만월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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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09년 02월 18일 (10:24)조회수조회수 : 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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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현덕사에서 공양주로 살고 있는 무여심 보살.

“돈으로다 보시는 못허드라도
내 노력으로 업장소멸 헌다먼 욕심인가?”

배움의 많고 적음으로 불심(佛心)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해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아니 바뀌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종선의 시조가 된 육조대사(혜능)가 노역에 종사하면서도 의법(衣法)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학식이 깊어서가 아니었다. 일자무식인 그에게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는 그렇지 못하다. 가난과 굶주림에 배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노보살들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기가 일쑤다. 간신히 공양미 한되 마련해 머리에 이고 수십리를 걸었던 그들의 신심(信心)도 함께 흑백사진 속의 한 장면으로 치부되고 만다.

# “논에 풀씨 볶어 먹고 그랬어”

강릉 만월산 현덕사(주지 현종 스님)에서 만난 공양주 무여심 보살(68·속명 김광예)도 여느 노보살들과 마찬가지였다. 보리밥 구경하기도 힘들어 칡뿌리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시절을 살아오면서도 일년에 한번(초파일) 절에 가기 위해 돈을 모았다. 절에 가서는 발디딜 틈이 없어 간신히 복전함에 돈을 넣고, 마당에서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자신은 “불자도 아니여. 절에 한번씩 가던거 가나보다 그랬지 뭐”라고 했다.

충남 천안삼거리에서 4남5녀 중 차녀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300평 남짓한 텃밭을 일궈 걷어들인 콩, 고구마 등을 먹고 자랐다. 해방 후에는 곧바로 6.25전쟁이 나 피난을 가야했고, 돌아온 고향에는 쑥이 자라지 못할 만큼 흉년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배우겠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피난 갔다 와서 이태(2년)를 숭(흉)년이 들었어. 비가 안오니까. 들에 쑥이 없었다면 말 다했지 뭐. 피난 갔다가 와보니깐 모심어놓고 갔덩 배(벼)가 없더라고. 쥐가 먹고 뭐가 먹고 뭐 있어? 솔방울 따다가 시장에 팔아봐야 보리쌀 한되나 팔아오기 심(힘)들었어. 그 땐 산에 칡뿌리가 배겨나지 않았다면 말 다했지 뭐. 논에 모 숨기(심기) 전에 나오는 풀씨 목을 꺼떡 쳐서 볶어 먹고 그랬어. 공부? 못했어. 밥먹고 살기도 심드는디. 어깨 넘어로 보고 조금 눈은 떴어.”

# “아들 뱃속에 넣고 모숨으로 나녔어”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절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22살 때 시집을 가서였다. 시아버지와 2명의 시동생까지 함께 살았던 그는 아이를 임신하고도 모내기 등 품팔이를 했다. 그나마 절에 갈 수 있는 것도 큰 복(福)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 때 다닌 절이 화성 용주사다.

“오산으로 시집을 갔지. 밥장사하던 큰엄니가 사람이 괜찮것다고 무작정 조카딸을 보낸거야. 우리 영감은 돌 깨로 댕이는 사람, 석수쟁이라 그러지. 비 많이 오면 쉬어야 되지, 눈오면 쉬어야지, 돈 못 벌고, 또 잘 못만나면 월급도 못 받어. 그래 국수를 한달 먹고산 적도 있어. 없는 놈이 시집왔으니깐 천상 밭이래도 매로 대니야 헐거 아니여. 모숨으로(모심으러) 댕기고 밭 매러 댕이고 새색시가 그랬어. 큰아들 뱃속에 넣어 가지고 모숨으로 다녔어. 그렇다고 우리 시아버지 밥 굶길 수도 없잖어. 그래도 1년에 한번썩 절에 갔어. 오산에서 절이 어디냐허먼 용주사라. 1년에 한번썩 밖에 절에 못가. 먹고살기 심(힘)드는디 절에 갈게 어딨어. 4월 초파일날 용주사 절이 터져. 들어갈 틈도 없어. 잠깐 들어가서 복전함에 돈이나 넣고, 절은 배깥에서 허고 나오는 거지. 어디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핼 수 있남. 부처님이나 뵈고 오지, 절에 들어갈 꿈도 못꿨어. 그 전에도 절에는 안다닌 게 아니라 인저, 남들 가니까 구경간다고 좇아 다닌 거야. 적극적으로 절에 다닌 거는 나이가 먹으니깐.”

# “아플 땐 오만 부처님 다 찾았지”

마흔 즈음에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라고 했고, 오산 인근 의사들은 “이 근처에서는 고치기 힘들다”고 했단다. 몸을 혹사시키고, 제대로 먹지 못해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마흔살 정도 됐을 때 죽는다고 내놨어. 의사들이 오산에서는 못 고친데. 서울 동상(동생)이 무조건 언니 올라와야 산다고 그러더라고. 경희대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약타다 먹고 그랬어. 깨떡 잘못허먼 수술헐 단계래. 신장이 안좋다고 그러다고. 몸이 엄청 많이 부어 가꼬 뉘엇다 인났다 소변, 대변까지 받았어. 벽에 지대켜 가꼬, 인나지를 못했는데 뭐. 잠도 못자고. 들어누먼 숨이 맥혀 가지고. 친동상이 밥먹고 살만허니까 치료비 내주고 그랬어. 아플 땐 오만 부처님을 다 찾고 그랬지. 지금은 관세음보살님만 찾어.”

4남매를 낳고서는 자신이 직접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제지회사에서 15년간 막노동자로 일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서 잔업이 있는 날에는 밤11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 왔다. 그렇게 모은 돈은 자녀들 공부시키는데 고스란히 사용됐다.

# “먹고살기 힘들어서 공양주 간거지”

퇴직 후에는 오산시장에서 노점상을 했지만,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월세도 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절집 생활이었다. 무여심 보살은 “아들 딸 한테 피해 안시키고 살라고 이곳에 와서 살어”라는 말로 공양주가 된 이유를 대신했다. 6년 전 그가 공양주 생활을 시작한 절은 병천에 있는 선거사였다. 하지만 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른 곳을 찾던 중 현덕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공양주 생활은 그를 진정한 불자로 거듭나게 했다.

“밥만 먹고 돈 안나가는 거 없는가 허고 연구를 해봤더니, 절에 가먼 먼고 살만 허것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병천에 있는 선거사라는 절에 갔어. 먹고살기 힘들어서 공양주로 간거지 뭐. 그런데 절 법(法)을 알아야 허것드라고. 그러니깐 공부도 해. 초파일 때 한번썩 절에 가는 것은 건성으로 가는 거지만,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래도 엄중해. 될 수 있으면 나도 왕박(완벽)해야 헌다는 거. 몸이고 뭐고, 머리래도 자주 감아야 하고, 목욕 재개도 자주 해야 되고, 모든 면에 엄중하지. 여니 절에 하루 갔다 가는 거 하고 직접 내가 마지 지어서 올리는 거하고 많이 틀리지. 마지 뜰 적에는 침 튈깨비 일절 말도 안해. 누가 옆에서 벼락을 처도 말도 안해. 생각도 안해. ‘오직 이것은 부처님 마지니깐 깨끗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해. 부처님 마지 몰라가서는 참배 할적에는 현덕사가 번성하는 거, 오시는 양반들 건강하라고 만해. 오시는 양반도 그냥 안보내. 물이라도 꼭 잡수게 해서 보내. 그래야 마음이 깨운허니까. 친절함으로써 다시 찾아오지 않겠어.”

# “내가 업이 많아 자손들 힘든 갑다”

무여심 보살은 공양주로 생활하면서 신세한탄만 했던 가난도, 자식들이 힘들게 사는 것도 다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리고 그것을 부처님 일을 하면서 조금씩 소멸하려고 노력한다.

“평생에 내가 업을 많이 지었다는 것을 절에 와서 많이 깨덜어. 자손들이 힘드는 것이 엄마가 업을 많이 지어서 자손들이 힘든 갑다. 진짜 그런 거 같어. 내가 전생에 업을 많이 지어 가지고 그런 것 같어. 오늘날까지도 어떤 부모가 자석 잘되길 바라는 것은 똑 같어. 나는 부자되라 소리는 잘 안해. 건강만 허라는 거. 건강만 허먼 솔직히 노력해서 안되는 일 어딪것어. 자손들 건강, 난 맨날 그거야. 전에는 그런걸 몰랐어. 돈으로다 보시는 못허드라도 내 마음으로 노력으로 업장이 소멸이 안될까 그런 생각을 혀. 사람 욕심인가?”
그는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정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매일 법당에서 정근을 하는 것 뿐 아니라 걸어다니면서, 차로 이동을 하면 시간이 날 때면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찾는다.

“늘 관세음보살님 기도를 해. 정근 하는거지 뭐. 여기 처음 왔을 때는 관세음보살님을 찾으매 108배를 했는데, 요샘엔 허리가 아파서 절을 못허니깐 그냥 정근만 해. 법당에 앉아서 10분이고, 20분이고 해. 걸어갈 때, 차에 타고 한가허잖아. 그러면 염주 돌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찾어. 저 지내간 달에 이상한 꿈을 꿨어. 광목 옷 같은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들이 초가집에 댓명이 앉아 가지고 뭐라고 지껄이는데, 내가 자꾸 현덕사 길을 잊어 먹었으니 가르켜 달라니까 말을 안허드라고. 그라고 있는데 현종 스님이라고 그래. 손을 딱 치면서 ‘공양주 너 여기 왜 왔냐’고 야단을 혀. 그래서 현덕사를 잊어먹었다고 그랬더니 ‘빨리 못가느냐’면서 내 손을 딱 치면서 ‘여기가 느그 집인데 그러냐’고 그래. 그러고보니 법당 앞이야. 신장님이 변각을 했나봐. 오지 말라는데니깐 좋은 데는 아닐 거야. 깨서 부처님한테 감사하다고 그러고, 관세음보살님한테 감사하다고 그랬어.”

“평생 절에서 살고 싶은 심정 그거 밖에 없어”고 말하는 그는 ‘무여심’이라는 자신의 법명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글을 몰라서도, 신심이 없어서도 아니다. ‘공양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해서 라지만, 어쩌면 “부처님 마지 지을 적엔 엄중해야지”라는 그의 말이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을 더럽힐 수 없다는 일념이 아닐까 싶다.

강릉=윤승헌 기자




발행일 : 2007-01-20
작성일 : 2007-01-24 오전 10: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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