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은
가을은 빨리 오지만
봄은 아주 느리게 온다
산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고
새순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저절로 대 자연의 순리에
숙연해지고 내 고개도 숙여진다
현덕사 개원 이듬해 백여 그루나 심은 매실나무가 서너 그루만 살고 다 없어졌다. 진주에서 이곳 강릉까지 온 것이라 기후 차이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살아남은 몇 그루도 둥치만 굵어졌지 꽃도 안 피고 해서 기대를 안했는데 지난 겨울의 끝자락에 우연히 눈 속에서 수줍게 대여섯 송이의 매화꽃망울이 보여 얼마나 예쁘고 반갑고 기특하던지 행복했었다.
올해는 날이 풀리기도 전부터 나무에 문안을 했는데 꽃망울이 여태까지 못핀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듯이 많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따스한 봄날을 시샘한 꽃샘추위와 춘설이 내려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얼은 것을 녹여 꽃을 피우려 노력하는 매화나무가 안쓰러워 보인다.
어린 시절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 뒷산에 칡을 캐러 갔던 추억이 있다. 살이 없는 숫칡을 버리고 살이 통통한 암칡을 눈 녹아 흐르는 개울물에 씻어 먹었다. 단 맛이 많이 나고 갈분도 많이 생겨 아이들의 봄 간식으로 최고였다. 요즘 절 주변 정리 작업을 하다가 칡뿌리가 나오면 그 맛이 그리워 먹어본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월이 가면 입맛도 변한다고 했는데 칡뿌리 맛은 그 때의 그 맛이다.
지난해 식목일에 벌나무 오십여 그루와 마가목 이십여 그루를 사찰 주변에 심었다. 마가목은 잎이나 줄기 그리고 열매를 차로 달여 먹으면 좋은 것이고 벌나무도 차나 약재로 최고란다. 그런데 칡이 얼마나 많고 번식이 왕성하던지 온산을 칡넝쿨로 덮어버린다. 애써 심어 놓은 나무마다 칭칭 감고 올라가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고 가지를 부러뜨리는 아주 못된 나무다. 유월쯤이면 예쁜 보라색 꽃이 피는데 꽃의 수정을 위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려고 그 넓은 이파리를 접어 꽃을 드러내 놓고 있다. 종족 번식을 위한 자식을 위한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칡은 주위에 가시가 많은 엄나무나 참두릅, 찔레나무를 피해 유독 가시가 없는 벌나무나 마가목에 집중적으로 공격하듯 칡줄기를 감아 놓는다. 칡도 생존을 위해 지혜가 있는 것이다. 내가 정성스레 심어놓은 마가목과 벌나무를 위해서는 잎이 나기 전에 칡넝굴을 잘라 걷어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벌나무와 마가목을 살리자고 죄 없는 칡을 마구 죽일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절에서 십여 년 전부터 사람들에 의해 죄 없이 죽어간 동물들, 식물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오고 있다. 소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산중 생활도 내 작은 욕심으로 부지불식간에 죄없는 많은 동식물들의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올해도 잊지 않고 인간들의 욕심과 편리를 위해 사라져간 동식물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낼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연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으며 서로 의지하여 있다.’ 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 올릴 때 이 일은 의미 있는 행사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곳 강원도 산골은 가을은 빨리 오지만 봄은 아주 느리게 온다. 산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고 새순들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저절로 대 자연의 순리에 숙연해 지고 잘나지 못한 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때가 되면 비 내리고 눈이 오고 이슬이 내린다.
[불교신문2905호/2013년4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