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사 대웅전 앞에는 물이 담긴 큰 함지박 여섯 개가 놓여 있다. 연못을 대신해 연뿌리를 심어 연꽃을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연꽃의 새순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매년 봄 일찍부터 연통에 물을 받아 새순이 올라오길 기다리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주변 환경에 조금 덜 민감한 수상식물을 심어야겠다 생각하고 이번엔 부레옥잠을 심었다. 수수하면서도 환하게 피워내는 보라색의 꽃을 보려고, 해마다 옥잠을 물 위에 띄운다. 그런데 지난해도 그 예쁜 꽃을 볼 수 없었다. 올해도 몇 번이나 옥잠을 함지박에 띄웠는데 꽃을 아직 보지 못했다.
고라니 때문이다. 옥잠을 사다가 띄우는 족족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다 뜯어 먹는다. 그것도 잔뿌리만 남기고 깡그리 다 먹어 치우기 때문에 부레옥잠이 살아나 꽃을 피울 가능성이 전혀 없다. 결국 옥잠을 사다 넣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물은 계속 채워 주어야 한다. 물이 가득한 함지박 속엔 올챙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올챙이들이 빨리 크길 바라는 마음으로 먹이를 챙겨주고 있다. 함지박 속 올챙이가 자라나 봄, 여름 밤에 개구리 노래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다. 부레옥잠이 있을 때는 올챙이가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는데, 이제는 뜨거운 햇빛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고라니가 무자비하게 옥잠을 뜯어먹으면서, 옥잠 뿌리에 숨어 있던 올챙이들이 뿌리에 딸려 나와 바닥에서 죽어간다.
고라니의 만행은 또 있다. 밥에 넣어 먹으려고 완두콩을 심었는데, 이 고라니들이 새순부터 줄기에 난 콩잎까지 깡그리 잘라 먹었다. 앙상하게 줄기만 남아버린 완두콩 줄기를 보면 속상하기가 이를 데 없다. 시내에서 절까지 오고가며 밭을 일구고 가꾼 거사님의 보람이 없어져 버렸다.
몇 년 전에는 옥수수를 심었는데 한 통도 못 먹었다. 그때엔 멧돼지의 소행이었다. 그래도 사람 먹을 것은 조금 남겨 두고 먹어치우지, 산짐승들은 최소한의 양심도 없나 보다. 불살생을 제 1 계율로 삼고 사는 승려가 이들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성껏 농사지은 작물을 싹싹 먹어치우는 산 짐승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그들 역시 이곳 만월산에서 살아가는 주인임을 생각한다. 우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권리가 있고 이 산에서 나는 것을 맘껏 먹을 권리가 있다. 같은 산자락에 사는, 어찌 보면 우리 현덕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셈이다.
그리도 밉고, 만나면 한 대 때러 주고 싶었던 멧돼지가 요즘은 통 보이지 않는다. 내심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걱정도 든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열병으로 산돼지들이 다 죽어 버린 건 아닐까. 이제는 그리해도 좋으니 한번쯤 내려 왔으면 하는 마음조차 든다.
시골길이나 산길을 다니다 보면 온천지가 철조망으로 둘려져 있다. 인간의 재산과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산토끼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촘촘히 쳐져 있어 산짐승의 이동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들은 결국 그 안에 갇혀 죽고 말 것이다.
야생동물이 없는 산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동물들이 움직이고, 땅을 파고, 식물을 캐내어 먹고, 분비물을 땅으로 돌려보내고 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 땅에 함께 사는 생명체이기에 자연의 대순환 안에 조화롭게 공존해야한다. 야생의 동물이나 조류 더 나아가 곤충들도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이웃이다.
그래, 고라니가 망친 부레옥잠 함지박은 시간을 두고 다시 심으면 그만이다. 망쳐진 옥수수 농사도 다시 지으면 되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산짐승들이 먹지 않는 상추나 깻잎을 심어 먹으면 그만이다.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산짐승들도 다 지능이 있고 지각이 있어, 어딜 가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먹이가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들이 현덕사 마당을 잊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기다리며, 언젠간 아침 공양 후 템플스테이 온 사람들과 함께 하는 포행길에, 멧돼지가 땅을 파헤친 흔적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우리의 이웃이 다시 만월산으로 돌아오길 바라본다.
현종 강릉 현덕사 주지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