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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넉넉하게 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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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09년 02월 17일 (15:59)조회수조회수 : 1,801
지난 봄 식목일에 단풍나무 3백여 그루를 절 올라오는 길과 절 주위에 유마회거사님들과 함께 정성들여 심어 놓았다.

새잎이 나고 예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올 가을에는 단풍구경을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곳에서도 실컷 보겠구나하고 빨리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단풍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잡풀도 잘라주고, 쑥쑥 뻗어 나가는 칡넝쿨을 수시로 걸어내 주면서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무들은 하나 둘씩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 보였다. 병이 들었나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색깔과 같은 보호색을 띠고 나뭇가지 모양을 벌레들이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내면서 수십 마리씩 떼를 지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갉아먹어도 정도껏 갉아먹어야지 어떻게 한 잎도 안 남기고 몽땅 갉아먹을 수 있나.

농약방에 물어보니 그 벌레는 대벌레라고 하는건데 살충제를 쳐도 한가지로는 안 죽고 두 가지를 섞어 쳐야만 된단다. 그래도 안 죽는 놈은 안 죽고 살아나는 아주 무자비한 독한 벌레라고 한다.

대벌레들이 너무나 야속해서 독한 마음먹고 살충제 두 병을 샀다. 오는 길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보면서 내일 당장 약을 뿌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단풍나무 가지에 일정한 모양과 간격으로 처놓은 거미줄을 보면서 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대벌레 때문에 거미를 죽이는 것은 아닌지. 또 그토록 찾아 헤메던 반딧불이, 며칠 전 개울에 방생한 다슬기,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맑고 고운 소리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매미들. 그 죄 없는 많은 생명들을 같이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징그럽지만 손으로 한 마리씩 떼어 내기로 했다.

여기는 산 속이라 가을이 다른 곳 보다 일찍 오는 것 같다. 무리지어 나는 고추잠자리와 길게 드리운 산그늘이 짙어진 것을 보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벽 도량석 돌 때 맑은 동쪽 하늘 끝에 나타난 아주 밝게 빛나는 오리온별 자리가 깨끗한 새벽공기와 함께 초입의 가을 산사에서 사는 맛을 한청 더해준다. 농약 한번 치지 않았지만 벌레 하나 안 먹고 병 한 번 하지 않은 빨간 고추를 하나가득 평상에 늘어 말린다.

가을 햇살을 받아 파아란 하늘빛 때문에 더 붉게 보이는 튼실하게 잘 익은 고추를 보면서 모종은 하고 물주고 고추대 세우고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김을 멜때의 고생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이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200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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