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근기 따라 법문 펼쳐 부처님 대기설법 듣는 듯
지난 9일 강원도 강릉 교외의 만월산 현덕사(주지 현종)에선 보기 어려운 천도재 행사가 열렸다. ‘동·식물을 위한 49재 및 천도재’였다. 현덕사 개산 7주년 기념을 겸해 열린 거대한 행사였다. 올해로 4번째.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천도재와 49재는 거의가 ‘인간을 위해 인간들이 베푸는 행사’다. 그런데 현덕사에선 인간들이 평소에 알게 모르게 동식물을 상대로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소멸하기 위한 행사였다.
인간은 배고픔을 해결한다는 명분과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죄 없는 동·식물들을 죽이고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더 간악해져 간다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 그러나 이날 ‘현덕사 천도재 행사’는 그와 같은 인식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행사장에 에 초청법사로 참석한 암도(岩度)스님도 말했듯이 “동·식물까지 모든 생명들의 영가와 영혼들을 위해 이렇게 정성을 다해 천도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날 행사의 마지막 프로그램이 진행될 땐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이 벌겋게 변하는 듯했다. 강원도 내 여러 환경보호단체에서 그동안 치료하고 보호해온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방생해 주는 행사였다. 거기서 방생된 한 떼의 비둘기 무리는 풀어주자마자 법당 하늘을 크게 세 바퀴를 돌고는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날 법당 앞마당에 있던 많 불자들은 기립 박수로 비둘기들의 앞날을 축원했다. 암도스님은 이날 동식물들의 천도재를 통해 축원 받은 그들과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진리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날의 초청법사인 암도 스님은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 ‘평등’을 주제로 하여 기억에 남을 법문을 폈다. 스님은 조선시대의 함허득통 선사가 말한 ‘석가(釋迦)도 안횡비직(眼橫鼻直)이고 인인(人人)도 역안횡비직(亦眼橫鼻直)’라는 대목을 예로 들어 부처님의 ‘평등사상’을 설명했다. 역시 스님다운 법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설법으로 인해 그날 행사의 의미가 한층 고양됐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과 꼭 같이 생겼는데 왜 우리는 부처님처럼 되(깨닫)지 못하는가, 우리도 누구든지 ‘평등’하게 대하고 자신도 부처님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걸 못한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 대목에서 청중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부처님처럼 그렇게 평등하고 원만한 생각을 내지 못하고 분별하고 차별하고 시기·질투를 하기 때문에 중생인 것이다”고 질타했다. 스님은 평등사상을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 재세 시에 있었던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다자탑이란 2600여 년 전 부처님 재세 시에 다자장자가 지어준 탑을 말한다. 당시 제일 수제자인 가섭존자가 부처님 포교장소에 늦게 도착,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없어 먼 곳에서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손수 불러 가까이 오게 하여 옆자리에 앉힌 스토리를 말한다. 스님은 이 대목을 가리켜 항간에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거염화’ 또는 ‘염화미소’등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화두로 삼을 때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면 영원히 풀을 수없다고 잘라 말했다. 염화미소의 참뜻은 자유라고 설명했다. 부처님이 꽃을 든 것도 자유이고 가섭존자가 웃은 것도 자유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와 말미암을 유, 즉 자기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도 같은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힘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자주적으로 살려면 자조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립할 수 있다. 이런 바탕위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인 자주 자조 자립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스님은 강조했다. 이런 깊은 뜻을 부처님은 2600여 년 전에 보여주었다고 설법했다.
스님의 설법은 이렇다. 이런 점이 스님법문의 특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는 사람(청중)의 근기를 헤아린 다음 설법을 한다고 말한다. 청중들의 수준에 맞게, 또 알아듣기 쉽게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도 스님의 설법을 가리켜 ‘암도식 인생강좌’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다.
이날 법문직전 스님은 날씨가 무더워 불자들이 흥미 없어 할 것을 간파하고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지혜인’과 ‘사랑’이라는 용어로 택해 설법을 폈다. 먼저 스님은 세상에선 지성인이라는 말을 많이 쓰면서 모두가 지성인이 되면 세상이 편안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지성인보다는 지혜인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스님은 자신만 아는 사람을 ‘외눈박이’ 또는 ‘지식인’이라고 부른다고 정의했다. 이런 부류는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 모두 같다고 부연했다. 훈장이나 초등학교선생이나 대학교수나 같은 부류로서, 이들은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고 개중엔 큰 소리를 치기도 하지만 대개가 별 볼일 없는 부류라고 말했다.
지성인은 이보다 단계가 높은 부류로서 이 세상의 본성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부연하자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불성(佛性)을 아는 사람이 곧 지성인이라는 설명이다. 남자와 여자도 자신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지성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많아도 지성인 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지성인의 단계 너머엔 지혜인이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다른 제3의 눈을 갖고 있는데 이를 지혜의 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언급하면서 스님은 우리 사회의 병폐 하나를 꼬집어냈다.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큰 폐해를 입히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반성케 하는 대목이었다.
스님은 우리 사회가 못쓰게 돌아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누구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풍조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사랑이란 내리사랑으로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든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든지 할 때 말이 되는 것인데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하는 풍조가 확산, 거꾸로 가는 듯하다고 개탄했다. 예를 들어 여자가 남편보고는 “사랑해”가 아니라 “사모해”라고 말해야 옳은 표현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사회가 사랑으로 망친 줄 알아야한다고 단언했다(러브호텔 등). 사랑보다는 존경할 때 더 큰 힘이 나오고, 존경보다는 공경할 때 훨씬 더 크고 강한 힘이 나오는 법이라고 정의했다.
스님처럼 불자들의 근기 따라 법문을 펴는 스님이 점점 더 아쉬워지는 시대가 되는 듯하다.
글=김병규 논설위원/사진, 정리=하경목 기자
발행일 : 2006-07-15 작성일 : 2006-07-15 오후 3:00:32 작성자 : 김병규 / 본지 논설위원
출처-만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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