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겨레신문 휴심정에 실린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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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혜민스님 | ||
등록일 | 2012년 12월 26일 (23:08) | 조회수 | 조회수 : 3,351 |
작년에 어느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 어느 비구니 스님께서 친견하는 큰스님을 앞에 두고는 “큰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즉 그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께 깨달음의 자리,부처 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선문답 삼아 여쭈어 본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큰스님께선 주장자로 바닥을 한번 쿵 때리셨는데, 선문답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답이 저런가 그랬을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조석으로 예불을 할때 불상佛像을 향해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처님 법을 공부한 이라면 부처님상은 밖으로 나타낸 상징이지 그 비구니 스님께서 궁금해 하신 깨달음의 자리,부처 자리가 불상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것이다. 그러기에 금강경에서도 상相으로써 부처를 보려고 하면 볼수 없다고 그랬고, 선지식이신 큰 스님을 앞에 두고도 큰 스님 어디 계십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자들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경험하고 싶은 부처 자리에서 우리는 한번도 떠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수행자가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목표 삼아 열심히 수행하더래도 종국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미 벌써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면 세상 도처가 다 부처 자리고 깨달음의 자리이다.하지만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해 주면 친절하지 않다. 간절히 궁극을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 지금도항상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고, 이미 원하는 종착지에 벌써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래도 듣는 사람은 너무도 불친철하게 느낄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처처에 두루 존재하는 부처 자리를 어떻게 알수 있는지 부족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한번 해 보도록 하겠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는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앎”이다. 예를 들어 깨닫기 위해 조용히 앉아 참선을한다고 해 보자. 보통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 올라 왔을 때 위빠사나를 한다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떠 올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거나, 수식관을 한다면 다시 숨의 숫자를 세거나, 화두를 들고 있었다면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화두로 마음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때 우리 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러면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 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어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무엇이 알아채나? 흔희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채는 것이 또 다른 생각이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 더 자세히 살펴봐라. 우리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어졌을때 항상 생각을 통해야지만 아는가? 예를 들어 배가 고플때 생각으로 “아! 지금 배 고프다”라고 굳이 생각을 내지 않아도, 언어화 하지 않아도 배 고프다는 사실을 즉시 알수 있지않는가? 똑같은 이유에서 생각이 올라왔을때 꼭 “지금 생각이 올라왔다”라고 언어화, 생각화하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무언가가 바로 알지 않는가?혹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자세히 한번 들어다 보면 알수 있다.생각이 떠 올랐을때 “지금 생각이 떠 올랐구나” 라는 생각 없이도, 언어의 작용이 없이도 즉시 무언가가 바로 고요한 가운데 그냥 안다. 여기까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 아는 자리를 좀 더 자세히 들어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부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번 자세히 보자. 우리가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 그아는 “놈”은 어떤 특별한 모양이나 형태가 있던가? 언어를 쓰지 않고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도 바로 아 지금 생각이 일어났구나하고 아는 그 자리,아는 그 “놈”을 자세히 봐라. 대개 우리는 생각을 그냥 따라가는데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를 봐라. 앎이 일어난 그 자리를 봐라. 그 아는 “놈”이 어떤일정한 모양이 있는가?형태가 있는가?자세히 한번 봐 봐라. 그 다음으로 앎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를 하는지 찾아봐라.그 아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봐라. 물론 처음엔 흔희 잘 살펴보지도 않고 내 몸안, 머리안에 있다고 할것이다. 왜냐면 내 몸을 항상 나라고 동일시하던 무시 이래의 버릇때문에 그런데 한번 다시 봐라.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구나 하고 아는 앎이 몸안에 있는가?아니면 구름에 가 있는가? 그 앎이 정말로 몸안에 있다면 구름이 몸안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않그런가? 내 눈앞의 벽을 봐라. 그 벽이 있음을 아는 앎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그 앎이 내 몸 밖 벽에서 일어나는가?아주 자세히 들여다 봐라. 그리고 나서 또 물어라. 앎의 기준에서만 봤을때안과 밖이 따로 있는가? 내 어깨가 결린것을 아는 앎이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아는 앎이 하등의 차이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 앎이 더럽혀 질수 있는지,물들수 있는지 한번 봐라. 내가 예를 들어 단풍 나무를 보고 나서 이어서 핸드폰을 봤다고 해 보자.단풍 나무가 있음을 아는 앎이 핸드폰을 봤을때 핸드폰이 있음을 아는 앎의작용을 물들일수 있는가?물들일수 있다면 핸드폰을 봤을때 그전에 봤던 단풍나무의 모습이 핸드폰 모습위에 중첩이 되어서 눈앞에서 어른 거려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단풍나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깨끗이 사라지고,핸드폰이 있다는 앎만 딱 있다.즉 이 앎은 허공 모양을 한 거울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대상이 사물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비추어 바로 알뿐,그 대상들이 거울 자체, 앎 자체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앎은 그 대상들이 마음 거울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앎 자체는 본래 청정한것이고,또한 이 세상이 생기기 이 전부터, 내가 이 몸받기 이전부터 지금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경험하고 싶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아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자가 그토록찾던 자리이다. 멀리 있는 것도 수십년간 고행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는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주위를 안으로 회광반조해서, 아는 자리의 모양이 따로 있는지,그리고 어디에 앎이 위치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봐라.앎 자체의 성품을 깨달을때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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