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시 찾은 돈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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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현종 | ||
등록일 | 2012년 10월 15일 (22:03) | 조회수 | 조회수 : 3,042 |
10여년만에 다시 찾은 돈황의 막고굴은 그대로 잘 있었다. 설레임이 몰려왔다 햇살이 내리쬐는 황량한 곳에 숨은 듯이 고요히 중생들의 희노애락을 지켜보며 계시는 수많은 불보살님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무슨 악연으로 부수어 훼손하고 잘라서 자기네 나라로 도둑질을 했단 말인가! 한국에는 한번도 와 본 적도 없다는 해설사의 도둑놈 도둑놈하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우리나라 사람인가 생각했는데 한족이란다. 우리 말을 오직 독학으로 했단다. 특히 경상도 말투로 설명하기에 어떤 연후인가 궁금했는데 지금은 입적하신 지관 큰스님께 배웠단다. 석굴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서인지 상세히 해박한 지식으로 구수한 유머와 입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다. 스님께서는 춥고 덥고 모든 환경이 열악한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계시면서 연구하시고 순례하셨단다. 그런 열정으로 최고의 불교대사전을 만드셨구나하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세상에는 항상하는 게 없다고 하는데 망가진 부처님이나 벽화를 보면서 무상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굴 하나를 조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한삽한삽 파고 흙을 퍼 날라 수많은 석굴을 만들고 부처님을 조성하고 벽화를 그려 점안식을 하고 환희로움으로 예불하고 오직 수행에만 몰두했을 그때의 수행승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신라시대의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기도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원본은 도굴꾼의 나라 프랑스박물관 한 켠에 전시되어 있단다. 스님께서는 목숨을 오직 부처님 법을 구하는데 맡기시고 그 먼길,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고 사막을 두발로 걸으셨을 것이다. 온 몸으로 체험하여 남기신 기행문으로 우리는 그 당시의 문화와 인간사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비행기로 기차로 자동차로 편안히 앉아서 가고 누워서 가도 힘이 들어 다들 불평불만인데 스님은 얼마나 힘들고 험난한 고행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으로 짠한 연민이 밀려와 슬픔으로 다가왔다. 석굴이 훼손이 심하여 참배하고 관람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파괴를 피한 부처님이나 벽화가 얼마나 정성을 드려 조성하고 그렸는지 감미로운 미소나 중생을 어여삐 지그시 바라보시는 부드러운 눈길에 온 몸과 맘에 환희로운 기쁨으로 가득찼다. 문화는 주위환경에 따라 만들어지고 발전한다. 맥적산의 석굴을 보면서 사람들의 능력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무한한 것인지. 날아다니는 새들도 그곳에 앉으면 어지러워 현기증이 날만큼 높은 곳에 부처님을 모셨는지, 아! 아! 감탄 뿐, 난 오직 모를 뿐이다. 오로지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 구도의 정신만으로 오직 신앙심만으로 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보살님들에게 이교도나 홍위병 등 악마들의 만행의 손길이 곳곳에 상처를 내어 놓았다. 순례하는 불교 성지마다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황금에 눈먼 마구니들이 부처님 얼굴에 금가루를 떼내어 순례자의 맘을 슬프게 했다. 신강박물관 관람 코스에 따라 갔더니 내 기억이 맞다면 10여년 전에 누워있던 그 미이라가 맞을 것이다. 남자, 여자미이라. 살았을 적에는 얼마나 도도하고 멋도 내고 외간 남자들 앞에서는 옷깃을 매만져 손목도 안보였텐데 지금 누워있는 모습이 하도 애처로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이라는 관련 학자들이 연구용으로나 이용해야지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은 죽은이의 인격을 배려하지 못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법의 길에서 만난 흔적의 기억이 떠오른다. 강릉 만월산의 가을은 깊어만 간다. [불교신문 2855호/ 10월1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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