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계종 포교원 주관 제4차 포교종책연찬회의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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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9년 02월 12일 (17:44) | 조회수 | 조회수 : 2,835 |
불기 2550년 11월 7일(화) 2시에서 4시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회의실에서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주관의 제4차 포교종책연찬회가 "농촌지역 사찰 활성화방안 연구" (-사찰의 지역사회 역할개발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습니다 현종스님께서 제2주제 발제2를 담당하시고 종합토론에서도 많은 훌륭한 의견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비밀번호 : 1234 ) ------------------------------------------------------------------------- ------------------------------------------------------------------------- 제2주제 발제문 2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환경포교 현종스님 / 강릉 현덕사 주지 차 례 1. 글에 들어가며 2. 현덕사를 창건하며 3. 현덕사를 함께 나누며 4. 글을 마무리하며 1. 글에 들어가며 한국 사회가 빠른 속도로 산업화의 물결 속에 빠져들면서, 농촌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은 보편화된 현상이다. 강원도는 다른 시도에 비해 그 변화 속도가 더욱 가파른 실정이다. 농촌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푸념 아닌 푸념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접어든지 오래된 농촌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나마 최근 들어 각박한 도시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 살고자 농촌으로 돌아오는 귀농인구가 조금 늘고 있을 뿐이다. 포교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처님 제자들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사명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고, 앞으로도 그 중요성을 저버릴 수 없는 농촌에 대한 포교는 불교계가 풀어야할 중요한 숙제이다. 하지만 농촌포교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부족하고, 포교 방법에 대한 개발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다른 종교에 비해 적극적이지 못하고, 또한 정보를 공유할 공간 자체를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포교원이 주최하는 이번 포교종책연찬회를 통해 농촌 지역 포교 활성화를 위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어 한국불교의 활로를 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강원도의 작은 시골에 위치한 현덕사가 지난 1999년 창건되어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 뿌리내리려고 노력했던 과정을 발표하고자 한다. 아직 10년이 채 안된 신생사찰이지만, 지역을 기반으로 포교하고 있는 소박한 경험을 밝히려고 한다. 2. 현덕사를 창건하며 대부분의 수행자가 그러하듯 부처님과 그 가르침이 좋아 출가사문이 되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 느낀 환희심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현덕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현덕사를 창건하면서 사찰의 문턱을 낮추어 누구나 주인이 되는 사찰을 만들어보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그리고 천진불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도량’으로 장엄하고 싶다는 발원을 했다. 외가집처럼 편안한 사찰, 시골 고향집 같은 그런 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심신(心身)이 지쳤을 때, 자연이 주는 새로운 기운으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자 할 때,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오는 그런 절을 만들고 싶었다. 중앙승가대 졸업을 몇 달 앞둔 1999년 7월1일 현덕사의 첫발을 내딛었다. 무더위가 시작되려고 할 무렵이었다. 강릉시 연곡면의 만월산 중턱에 처음 개원할 당시는 사찰이라고 하기보다는 폐가가 되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본래 마을 민가를 어느 스님이 토굴로 사용하던 것인데 1년 동안 비워두어 칡넝쿨이 온 도량을 덮어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개원식을 앞두고 보살님 몇 분과 함께 빗자루 등 청소도구를 들고 청소하러 갔다. 방은 금방이라도 쥐가 뛰어나올 듯이 어수선했고, 여기저기 거미줄 투성이었다. 마당에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잡초로 사람이 다니기도 힘들었다. 7월10일 은사스님을 모시고 어렵사리 개원법회를 열었다. 당시 현덕사 불사를 발원한 불자 5명과 강릉 인근지역 불자 30여명이 참석하여 조촐하게 치루었다. 어렵게 개원법회를 치루고 나서, 절 아랫동네 주민들을 위해 떡을 몇 말하고 다포 300장을 만들어서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일일이 인사했다. 현덕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강릉시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시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시골에 자리하고 있다. 국도에서 30여분은 걸어 들어와야 한다. 당시만 해도 비포장 길이어서 비라도 오는 날이면 절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몇 되지 않는 신도들도 절에 오기 어려웠다. 더구나 본인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여서 재정적으로 궁핍하였다. 처음 문을 연 사찰이기에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빠듯한 살림에, 얼마 되지 않는 주방용품 살 돈도 부족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난감했다. 신도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신도들에게 어려운 살림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하고 협조를 구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매일 새벽에 기도를 나오던 4명의 신도들이 100만원씩을 보시하고, 어려운 절 살림에 대해 소문을 들은 이들이 신심을 내어 찾아주었다. 또한 손수 낫과 삽을 들고 도량을 깨끗이 정비하는 일에 신도들이 동참해 주었다. 라면을 끓여 찬밥을 말아 먹으며 어렵지만 하나씩 일궈 나갔다. 마치 호랑이라도 나올 것 같던 절이 어느덧 말끔한 도량이 되어 갔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절”이라는 노보살들의 칭찬도 큰 힘이 되었다. 사찰까지 들어오는 길이 좋아야한다고 해서 큰 돈 들여 포장공사를 하다가 적지 않은 손해를 보기도 했다. “이런 돈도 떼어 먹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마음씨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귀중한 체험도 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현덕사 오는 길은 흙 길이었다. 흙 길이다 보니 길이 고르지 못해 절을 찾는 불자들의 발걸음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침 예불을 마치고 나서, 삽과 괭이를 들고 진입로 1.6km를 오르내리면서 패인 데는 메우고 솟은 데는 깍아내리기를 몇 년간 하였다. 불자님들의 편한 발걸음을 위한 길 닦기란 생각을 하면 저절로 힘이 생기곤 했다. 또한 불자들이 잘 다듬어 놓은 길로 오면서 참 흐뭇하더라고, 우리를 위해서 스님이 이렇게까지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어떻게 하면 좀더 예쁘게 꾸밀까 궁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길가에 코스모스도 심고, 단풍나무도 300여 그루 구해 심었다. 절에 오시는 불자님들의 마음이 좀더 밝고 맑아지기를 기원하며 꾸민 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2년 태풍 ‘루사’로 그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도 피해였지만 저와 불자님들의 소중한 마음이 담긴 길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뒤에 강릉시에서 수해복구 차원에서 그 길을 시멘트로 포장해주었다. 비록 길은 편해졌지만 왠지 예전의 흙 길의 정겨움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그 정겨운 길을 만들기 위해 길가에 우리나라 들꽃과 나무를 심고 있다. 3. 현덕사를 함께 나누며 1)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와 경로잔치 현덕사의 봉축법회는 여느 사찰과 별반 다르지 않다. 관불의식과 봉축법요식, 점심공양, 저녁예불, 제등행렬, 다과회 등의 순서로 진행하고 있다. 이 작은 사찰을 찾아준 불자들을 위해서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싶지만 아직은 형편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에 제등행렬을 마치고 나서는 법당에 다같이 모여 다과를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날 애써 만든 연등에 불을 켜듯 마음의 등불도 함께 켜자 발원한다.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 못지않게 정성을 쏟는 것은 이때 실시하는 경로잔치이다. 시골에 있는 작은 도량이지만, 불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지역민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눌 방법을 고민했다. 한국 사회의 농촌이 갖는 특징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농촌에 살고 있는 노인분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갖기로 마음 먹었다. 경로잔치를 하기로 했으나, 사찰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리고 막 첫발을 내딛은 상황에서 현덕사 경내에서 잔치를 열기에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면소재지에 있는 복지회관을 빌렸다. 면사무소에 문의를 하니 연곡면에 거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700여 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분들을 다 모실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아 우선 300명을 초청했다. 면사무소에 경로잔치에 대한 홍보를 부탁하면서 “다 모실 형편이 되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힘드신 분들을 위주로 하여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절, 그것도 법당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한 절에서 경로잔치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주민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1년에 한 두 차례 면부녀회의 국수 대접이 있었지만, ‘스님이 잔치를 해 준다’며 너무도 반가워했다. 신도들과 함께 ‘우리 부모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며 준비했다. 소머리 국밥에 여러 가지 떡과 음료 등 음식도 최선을 다 했다. 노래방 음향시설도 준비해서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잠시라도 위안을 드리고자 노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의 손에는 선물도 하나씩 드렸다. “기왕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함께 드리는 선물도 수건이나 양말, 화장품 또는 돋보기 등 매번 달리 하여서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드리고자 하였다. 때문에 연곡면 주민들은 현덕사가 아주 큰 절인 줄 알고 있다가, 막상 와서 직접 보고는 “이렇게 작은 절에서 경로잔치를 성대하게 할 수 있냐”며 놀란다.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경로잔치에 참석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신도들의 손을 잡으며 “너무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면 그동안의 어려움은 눈 녹듯 사라진다. 현덕사 경로잔치에 대한 소문은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먼 객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도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고향집에 왔다가 경로잔치 이야기를 듣고는 부모님의 외로움을 달래주어 고맙다며 직접 찾아와 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원한 이듬해부터 시작한 경로잔치가 올해로 7년째를 맞이했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경로잔치에 참여하는 노인분들의 수가 늘어, 지금은 복지회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사찰불사도 진행되어 내년부터는 현덕사 경내에서 보다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경로잔치를 하기로 했다. 2) 지역 봉사활동 사찰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좀더 많은 지역주민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아울러 현덕사 신도들에게 불자로서의 자긍심도 심어주기 위해서, 2001년 1월에는 강릉시내에서 ‘어려운 이웃돕기 일일찻집’을 열었다.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일찻집이었지만 너무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수익금이 700여 만원이나 모였다. 그 수익금으로 강릉시내의 아동복지시설과 장애인복지시설에 후원하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인근 군부대에도 위문품을 줄 수 있었다. 이 일일찻집으로 좀더 많은 지역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아울러 현덕사 신도들에게는 불자로서의 뿌듯한 자긍심도 심어주게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설이나 추석, 부처님오신날 등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지역 노인정, 장애인시설, 소년소녀가장 가정, 독거노인 등을 찾아 쌀과 생필품 등을 보시하기도 했다.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것을 보시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조금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면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된 것이다. 200여명의 여성불자 모임인 동해 여성불자 공덕회는 현덕사의 일에 이웃집처럼 함께 동참하고 있다. 처음, 동해 공덕회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회향하고픈 마음으로 10여명의 불자가 모여서 시작했다. 매달 한 차례 모여 법회도 보면서, 작은 돈을 회비로 모으고, 새우젖도 팔아 수익금을 남겨, 불우한 이웃에게 쌀을 사주는 등 봉사활동에 사용한다. 이제는 회원수가 200여 명을 넘고, ‘공덕암’이라 이름 지은 작은 법당도 마련한 공덕회의 사회에 대한 회향의 활동은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서울의 제니스 합창단과 하유스님을 모시고 동해 장애인 초청 예술제도 하였다. 현덕사에서 하는 크고 작은 활동을 늘 함께 하고 있다. 선방스님들께 대중공양을 모실 때도, 군법당에 위문을 갈 때도, 성지순례도 함께 한다. 훗날, 공덕암을 현대식 실버타운으로 다시 지어, 회원과 하나 되는 터전으로 만들고자 한다. 3) 현덕사 개산법회 및 동식물 천도재 개산일을 맞아 매년 기념법회를 거행하고 있다. 농촌에 있는 절이기에 신도들이 다른 지역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개산법회 때는 눈 밝은 선지식들을 모셔와서 법문을 듣는다. 그동안 보각스님, 혜남스님, 수안스님, 영조스님, 청우스님, 종범스님, 암도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이 먼 길마다 않고 오셔서 법문을 해주었다. 또 이때는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동물과 식물 영가를 위로하는 천도재를 행한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무슨 동식물 천도재를 올리냐”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몇 해 동안 거르지 않고, 동식물 천도재를 지내는 동안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은 분들께 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식물 천도재를 처음 행하게 된 것은 현덕사를 개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백중 때부터였다. 백중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인연 있는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어린시절 나의 실수로 고향집 처마 밑에서 숨진 제비가 생각났다. ‘망(亡) 제비’라는 위패를 봉안하고 백중 기도를 하니, 마치 빚을 다 갚은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후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각나 개원법회를 할 때 천도의 대상을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까지 넓혀서 지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른 생명을 알고도 죽이고 모르고도 죽인다. 고속도로나 큰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어가는 이런 저런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의 편리함을 도모하다 무참히 깎여나가는 산하(山河)와 목숨을 잃는 꽃과 나무들에까지 생각이 다다랐다. 개산법회를 맞아 큰스님 법문을 듣고, 동식물을 천도한다면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동식물천도재를 시작했다. 새들이 좋아하는 조, 쌀, 수수 등도 차리고, 고라니나 산토끼가 좋아하는 칡넝쿨, 신선한 풀도 가득 상에 올려 동식물들의 혼을 달래주었다. 처음에는 이같은 나의 모습을 보고 신도들이 “이상한 스님이다. 재미난 스님이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동식물천도재의 뜻을 이해하고 오히려 적극 참여하고 있다. 동식물천도재는 올해로 4번째를 맞이한다. 연합뉴스와 강원일보, MBC 등 일반 방송 및 신문을 비롯해 불교신문과 법보신문, 현대불교, 불교방송 등 교계언론에서도 동식물천도재에 대해 취재를 해주어 ‘시골 절 현덕사’가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도들과 지역주민, 그리고 언론보도를 접한 외지인들까지 찾아와 동참하고 있다. 모두들 각자 자신과 인연 있었던 동식물의 위패를 스스로 모시고 자연의 고마움과 환경의 중요성을 알아가니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신도는 운전을 하다가 길가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고라니들을 보고는 지장보살님의 명호를 염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한다고 한다. 그 신도는 예전에는 죽은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 “끔찍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극락왕생 발원을 하며,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한다. 4) 환경의 소중함을 전하는 도량 현덕사는 만월산의 품 안에서 작은 시내를 끼고 평화로이 자리잡고 있다. 밤에는 별빛이 쏟아지고, 낮에는 햇살과 그늘막이 조화로이 어울리는 곳이다. 대부분 사찰이 그러하지만 그래도 현덕사만큼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곳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량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도량으로 만들어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만들고 싶다는 원력을 세웠다. 지난 2000년 여름 영월 동강 근처에서 반딧불이를 망에 담아와 도량에 풀어놓았다. 그랬더니 지금은 반딧불이가 현덕사 식구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도 반딧불이 모습을 보려고 가족들과 함께 밤이 되면 찾아오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 또한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헛된 짓이다. 우습다, 싱거운 스님이다. 할일 없어 그런다’라고 했지만 지금은 ‘참 잘하셨어요’라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다. 현덕사에는 우리 야생화가 지천이다. 저절로 피어난 꽃들이 대부분이다. 할미꽃, 벌개미취, 네발톱, 며느리밥풀떼기, 금낭화 ….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야생화들은 현덕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다. 특히 엄마 아빠와 함께 절을 찾은 어린이들은 ‘세상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있는지 몰랐다’며 즐거워한다. 매년 여름에 실시하는 어린이불교학교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도량 근처의 숲을 산책하고, 야생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만들었다. 숲 해설사를 초청하여 나무 보는 법, 꽃 이름 알리기, 우리 동네 잘 크는 나무들 등에 대한 지도를 하는데, 어린이들의 반응이 너무 좋다. 농촌에 있는 절에서 도량 한 켠에 야생화를 키우면 ‘자연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며, 특히 어린이들이 사찰에 친숙해지면서 동시에 자연환경의 소중함에 대한 교육도 받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 5) 어린이를 위한 여름불교학교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다. 한국불교의 미래 또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농촌 사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어린이 청소년 포교이다. 고령화되어 어린이 청소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현덕사는 매년 7월 마지막 금요일부터 2박 3일간 여름불교학교를 개최하고 있다. 매주 어린이법회를 열 계획도 세워보았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여름불교학교를 여는데 그치고 있다. 1년에 한 번 여는 불교학교이지만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교학교를 여는 목적은 “어린이들이 자연과 벗하여 자유로움을 느끼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와 생활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전통한옥에서 생활해보고 참선과 염주만들기 체험 등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또한 앞서 밝힌 대로 밤하늘의 별자리 찾기와 숲길 산책, 야생화 보기 등 자연친화적인 프로그램으로 일정을 짜고 있다. 여름불교학교는 올해로 7회째를 맞이했다. 그동안 힘든 일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숙소가 없어 신도들과 함께 천막을 설치해 어린이들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이후에는 2~3년간 군부대에서 막사를 빌려주어 숙소문제를 해결했다. 지금은 요사채 불사가 마무리 되어 어린이들을 맞이하는데 한결 마음의 짐을 덜어 놓았다. 어린이들이 쉴 수 있는 요사채를 만드는 데는 통도사 축서암 수안 큰스님의 도움이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큰스님은 당신의 작품 108점을 주시면서 “이거 가져다 보태서 요사채 지어라”고 하셔서, 청소년 수련원을 짓기 위해서 강릉의 문화예술회관에서 선서화 전시를 열었다. 큰스님의 도움으로 수련원으로 쓸 요사채를 짓고 여름불교학교를 매년 어려움 없이 진행하고 있다. 또 동국대에 다니고 있는 비구니스님이 여름불교학교 지도법사를 맡아 80여명의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처음 여름불교학교를 열었을 때였다. 오대산 지장암의 한 스님께서 오셔서 “이 산중에 어느 스님이 이토록 장한 일을 하느냐”면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쌀 한 가마니를 흔쾌히 건네주고 가신 적도 있다. 이같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덕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강릉에서 여름불교학교를 하는 절이 현덕사 뿐이었는데, 이제는 5곳으로 늘어났다. 어느 사찰이든지, 어린이들 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10명이라도 모아서 시작해야 어린이들이 다른 종교단체로 빠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와 고유한 정서를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우리 스님들의 일이다. 최근 시골에는 폐교가 많이 늘고 있다. 한 개의 사찰의 힘으로 운용하기에 어려울 경우에는, 사암연합회 차원에서 공동으로 폐교를 인수하여 ‘수련시설’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6) 군포교 강원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군부대가 많다. 강릉 또한 마찬가지이다. 스무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부모형제와 헤어져 군복무를 하는 장병들을 볼 때면 기특한 생각과 함께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가를 고민하게 된다. 장병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 법당일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군부대 위문이었다. 신도들과 함께 8사단 법당을 찾아 법회를 보고 맛있는 점심공양을 낸다. 현덕사 형편 때문에 1년에 한두 번 위문하는 것에 그치지만, 너무나 반가워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면 환희심이 난다. 대부분 군법당이 초코파이와 떡을 주고 있는 실정이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하려고 애썼다. 떡과 회덮밥, 과일, 음료수, 그리고 선물로 줄 염주를 갖고 군법당을 찾는다. 젊은이들이 군법당에서 맺은 인연으로 제대 후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도들에게는 조계종 군종교구에서 1만원 2만원 매월 보시하는 군포교 후원자 모집에 참여하라고 적극 권하고 있다. 지난 8월 10일 특전사가 연곡 앞바다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스님과 함께 빵, 컵라면, 아이스크림, 음료수를 각각 200개씩 구입해 찾아 갔다. 그리고 함께 가져간 어징어 물회와 수박, 인절미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연곡 해변가 소나무숲 속에서 먹은 수박과 시원한 물회, 더불어 감미로운 시낭송회가 우리 장병들의 가슴에 깊이 간직되었을 것이다. 또 지난 국군의 날에는 수도경비사령부 법당을 위문했다. 횟집을 하는 신도의 보시 덕분에 250마리 오징어로 회덮밥을 준비하고, 떡과 과일도 가득 싣고 새벽길을 달려 서울에 왔다. 신도들과 함께 손목에 염주를 걸어줄 때 환하게 웃는 장병들을 보면서 군포교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7) 신행활동 현덕사는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 때문에 다른 절과 달리 30대에서 50대 사이의 신도들의 주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젊은 신도들이 많은 까닭에 연세 지긋한 분들은 잘 오시지 않는 것이 지금은 풀어야할 과제이다. 또 각자의 생활이 너무 바빠서 개별기도를 많이 한다. 관음기도, 지장기도, 참회기도, 금강경독경기도 등을 지도한다. 매달 다섯 차례의 법회를 거행하고 있다. 초하루에는 가내 두루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신중ㆍ인등기도법회를, 지장재일에는 뿌리를 잊지 말라고 유주무주 애혼영가천도재법회를, 관음재일에는 자녀들을 위해서 지혜제일관음법회를 봉행한다. 또한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다라니 108독 철야법회, 세쨋주 토요일에는 가족동참법회를 실시하고 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현덕사는 강릉시내에서는 좀 떨어진 연곡면 삼산리의 만월산 자락에 있다.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다 용도로 쓰이는 요사채가 있고, 지역주민들이 자주 찾는 지하암반수는 맑고 깨끗하다. 처음 5명의 불자로 시작된 포교활동이 지역주민들과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가 이제는 불자가 300여명이 넘을 정도가 되었다. 허허벌판이던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짓고 나니 한숨 놓을 수 있다. 장래에, 요사채 맞은편에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체험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작아서 좋은 절, 소박하면서 편한 절을 창건 발원문에서 얘기했듯이 누구라도 신심만 가지고 오면 대접받고 기도할 수 있는 절을 만들고 싶었다. 요즘은 세상 사람들이 다 크고 웅장한 절에 가기를 원해 절도 그에 걸맞게 커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세상의 이치이므로 보통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 내 집처럼 편하게 올 수 있는 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 주위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산림욕을 하고, 산책을 하며 야생화를 볼 수 있는 친환경적인 사찰로 만들고 싶다. 심성까지 삭막하게 만드는 것 같은 콘크리트는 거의 쓰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자연 연못을 만들어 개구리들이 놀 수 있도록 하고, 미꾸라지도 살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환경 친화적이고 소박한 사찰운영을 최우선적 과제로 하고 있는 현덕사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경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서 상호의존적인 삶을 모두가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식물천도재를 지속적으로 지낼 것이다. 단순히 영가를 천도하는데 머물지 않고, 현덕사를 ‘환경본찰(環境本刹)로 만들어 생명존중의 도량으로 만드는 것이 미래의 현덕사이다. * 덧붙이는 글 강릉에는 현재 30만평의 택지가 조성되어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이곳에 관동불교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불자들의 사무실을 갖추고, 크지는 않지만 부처님을 모신 공간을 만들어 불자들이 새벽기도도 올리고, 시간을 쪼개 참선을 하는 등 맘 놓고 드나들 수 있는 포교당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넓은 택지에 교회는 수도 없이 들어오고 원불교도 들어오고, 성당도 들어오는데 우리 불교계는 손을 놓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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