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로 이 생에서(In This Very Lif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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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9년 02월 13일 (14:17) | 조회수 | 조회수 : 2,854 |
바로 이 생에서(In This Very Life) {바로 이 생에서} {In This Very Life} 사야도 우 판디타 by Sayadaw U Pandita. Boston: Wisdom,1992 (2538.2.16. 正圓 部分譯) 내용 머리말-죠셉 골드스틴 일러두기 독자들에게-사야도 우 판디타 전문용어에 대하여 1.기본적인 윤리와 수행을 위한 지침 1.1 인간됨의 기본적인 의미 1.2 수행에 대한 지침 1.3 걷기 수행 1.4 점검 2.궁극의 실재에로의 접근 2.1 무상(無常)에 대해 주의를 기울임 2.2 세심함과 존경심 2.3 끊어짐 없는 지속 2.4 보조적인 조건들 2.5 과거에 익힌, 도움이 되는 여건들을 다시 활용함 2.6 깨달음에 이르는 요인들(七覺支)을 닦음 2.7 용맹스런 정진 2.8 참아냄과 불굴의 인내력 2.9 흔들림 없는 실천력 3.마라(魔)의 열가지 군대 3.1 첫 번째 군대: 감각적 쾌락 3.2 두 번째 군대: 불만족 3.3 세 번째 군대: 배고픔과 목마름 3.4 네 번째 군대: 갈망 3.5 다섯 번째 군대: 혼침과 들뜸 3.6 여섯 번째 군대: 공포 3.7 일곱 번째 군대: 의혹 3.8 여덟 번째 군대: 아만과 고마움을 모르는 마음 3.9 아홉 번째 군대: 이익, 칭찬, 존경받음, 잘못얻은 명성 3.10 열 번째 군대: 자신에 대한 칭찬과 타인에 대한 비방 4.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요인들(七覺支) 4.0 고귀한 사람으로 되어가기 4.1 마음챙김(念) 4.2 법에 대한 고찰(擇法) 4.3 용맹스런 정진(精進) 4.4 기쁨(喜) 4.5 심신의 경쾌함(輕安) 4.6 마음집중(定) 4.7 평온(捨) 4.8 잘 닦아진 깨달음에 이르는 요인들(七覺支):불사(不死)에 이르는 치료법 5.위빠싸나 선(禪) 5.1 굳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줌 5.2 괴로움을 떨어내 버림 5.3 덮개와 대치법 5.4 이 세계의 본질를 이해하기 5.5 더 높은 위빠싸나 선(禪)을 이룸 5.6 열반에 대하여 6.열반에 이르는 수레 부록 도표로 본 깨달음에 이르는 요인들(七覺支) 덮개와 대치법 꿰뚫어 보는 앎의 점진적 향상 머리말 사야도 우 판디타께서 법을 가르치기 위해 1984년 처음으로 미국에 오셨을 때, 우리들은 오직 그 분을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후계자라는 명성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느모로든 우리들은 그 분의 가르침과 존재에 의해 많은 새로운 이해의 문이 열리는데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수행지도법사(Meditation Master)로서 그분은 수행의 미묘한 부분들을 통해 우리들을 지도하셨으며, 교학(敎學)에 밝은 학승으로서 그분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불어넣으셨고, 크나큰 정신의 벗(善知識)으로서 그 분은 최상의 자유를 구하라고 우리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켜주셨다. 부처님께서 고대 인도의 무사 계급 출신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야도 우 판디타께서도 우리시대의 정신적인 무사의 한분이시다. 용맹스런 정진을 강조하시는 그 분의 말씀은 바로 이 생에서 해탈이 가능하다는 기쁨에 가득찬 확신과 함께 하고 있다. 사야도께서는 조건지워져있는 마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인 가능성을 우리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셔왔다. 이 책은 메사츄세츠주의 바레(Barre)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회(Insight Meditation Society)]에서 사야도께서 처음 3개월 간의 집중수련기간 동안에 해주신 법문을 정리한 것이다. 그 분께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실제적인 여정과 심오한 이론적인 이해의 모델이라는 두 방면 모두에 있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 가르침들은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렇게 읽어보면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무르익어가는 그 분의 가르침의 친근한 면을 수용하게 될 것이며, 어느 정도는 오래된,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져오던 관점들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면서 우리들에게 부딪혀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응용되어진 담마(Dhamma 法)의 보고(寶庫)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지혜와 자비를 깨닫는데 도움을 받기를 기원한다. 죠셉 골드스틴 JOSEPH GOLDSTEIN 바레, 메사츄세츠 일러두기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출판되었다. 우리는 1984년, 메사츄세츠주의 바레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회(Insight Meditation Society)]에서 사야도 우 판디타께서 지도해 주신 수련코스를 마련하고 지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우 악가치타 U Aggacita스님께서는 정확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야도 우 판디타의 법문을 통역해주셨다. 론 브라우닝 Ron Browing은 녹음된 법문이 글로 정리되었으면 하고 요청했으며, 이블린 스위니 Evelyn Sweeney가 정성스럽게 글로 옮겨 놓았다. 우 먀 통 U Mya Thaung은 옮겨진 글을 한 자 한 자 검토해 주었으며, 에릭 콜빅 Eric Kolvig이 그 원고들 가운데 한 초고를 편집했다.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 이 책이 출판되는데 기여한 브루스 미텔돌프 Bruce Mitteldorf의 큰 공로에 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한다. 케이트 휠러 Kate Wheeler는 꾸준하고도 매우 능숙하게, 법문을 편집하는 일에 몇 달 동안 헌신해 주었다. 그 녀가 없었더라면 이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샤론 잘쯔버그 SHARON SALZBERG 위빠사나 수행회(Insight Meditation Society) 바레, 메사츄세츠 독자들에게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담마(Dhamma 法), 그리고 미얀마 양곤의 고(故)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담마, 즉 진리의 길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내적인 평온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겸허하면서도 진지한 나의 바램입니다. 나의 지혜가 나를 인도할 수 있는 한, 이러한 봉사를 여러분들에게 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 글의 출판에 의해 다섯 가지 이로운 목적이 이루어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글들을 통해서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는 담마의 새로운 면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만일 여러분들이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이미 접해 본 적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담마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다시 한 번 재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들에게 의심나는 점이 있었다면, 이 글들을 통해 그 의심들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넷째, 만일 여러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견해들이나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담마에 대한 올바르면서도 존경하는 태도를 지니게 됨으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벗어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이면서도 아마도 이로운 목적을 가장 많이 충족시켜주는 면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체험이 이 책에 쓰여져 있는 내용과 딱 들어맞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수행이 깊어진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체험이 이론과 합치한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은 즐겁고도 환희에 가득찬 경우가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수행해 본적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글들을 읽음으로써 수행을 시작해보자고 고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강한 약(藥)인 지혜를 얻게 되어 여러분들은 마음속의 괴로움을 떨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는 나의 개인적이며, 최상의 바램과 용기를 주겠습니다. 최고의 목적인 해탈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야도 우 판디타 Sayadaw U Pandita 전문 용어에 대하여 이 책에 쓰인 빨리(P li) 용어들은 영어로는 불가능한, 의미의 적확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번역되지 않은 용어가 나오면 독자들은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그 용어들이 간단하게 번역되지 못한 이유와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빨리어는 이런 식으로 미얀마와 위빠싸나 수행이 실행되고 있는 나라들의 대부분의 수행 센터에서 사용되고 있다. 빨리어 단어가 현재 쓰이고 있는 언어들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을 때, 그 단어들의 복수형 변화어미는 불가피하게 탈락되거나 약간의 사소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이 책에서 사용된 빨리어는 일반적인 학문적 용법과는 약간 다를 것이다. 이것은 사야도 우 판디타께서 태어나서 교육받은 미얀마에서의 용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이러한 용어들이 특수하게 위빠싸나 수행과 이해방식에 치밀하게 적용되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복수형 또는 형용사적 어미에 대해서는 그러한 어형에 해당하는 영어의 형태를 사용하였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말은 고딕체를 사용했으며 점차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문용어들에 대한 정의는 책 뒤의 용어 해설를 참조하기 바란다. 1. 기본적인 윤리와 수행을 위한 지침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평화로워지는데 기여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고, 믿을만한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다. 우리도 역시 부처님께서 이루신 청정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청정함을 우리들 자신 안에서 이루게 되면,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가면서 이 담마, 이 진리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의 세 가지 덕목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즉, 계(戒 S la)·정(定 Sam dhi)·혜(慧 Pa )이다. 이 말들은 각각 윤리(적 규범), 마음집중, 통찰적인 지혜로 옮길 수 있다. 계(戒 S la)를 맨 먼저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나머지 두 덕목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계 즉, 윤리적 규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계가 없으면 더 이상 수행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재가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단계의 계로는 5계, 즉 자신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규범을 들 수 있다. 다섯 가지란, 첫째,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 셋째, 바르지 않은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는 것.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다섯째,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 등을 먹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덕목들을 지킨다면 기본적인 마음의 청정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는 수행의 길을 따라 향상해 나가는 일이 쉬워지게 된다. 1.1 인간됨의 기본적인 의미 계(戒 S la)는 부처님에 의해 공표된 계명(誡命)이 아니며, 딱히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한정지을 필요도 없다. 실제적으로, 계는 인간됨의 기본적인 의미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덕목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고 있으며,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상태에 있다고 상정해보자. 여기에서 만일 우리 자신을 우리가 해를 끼치려고 하는 상대방의 입장에 세워놓고, 솔직하게 우리가 계획하고 있었던 행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아냐, 나는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그런 행위는 잔인하고 온당치 못해'라고 즉시 대답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느끼고 있다면, 이러한 행동은 온전치 못한(unwholesome) 것임을 우리는 아주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윤리적 규범이란, 우리들은 다른 존재들과 하나라고 하는 느낌이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어떠한 느낌인지를 알고 있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살펴 주고 배려해 준다면,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실된 말을 해야 하지, 욕하거나 속이거나 비방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화내는 행동과 언설을 삼가 하는 수행을 할 때, 이러한 거칠고 온전치 못한 정신적 상태는 점차로 생겨나지 않게 되거나, 최소한 약화되거나 생겨나더라도 그 빈도수가 적어지게 된다. 물론 화내는 것만이 남에게 해를 주는 유일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탐욕이 있으면 우리들은 비합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욕망의 대상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또는 성적인 욕망이 생겨나면 다른 사람의 짝에게도 욕정을 일으켜 집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탐욕스런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 할지라도,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 등을 마시거나 먹게 되면, 감각이 무뎌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보다 쉽사리 분노와 탐욕이라는 거치른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마약이나 알콜을 상습적으로 취하면서 이러한 물질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이런 향정신적 약물들은 대단히 위험하다.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약물 때문에 망각 상태에 빠져 버릴 수 있게 된다. 범죄의 공범자와 같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 또는 약물 때문에, 무의미한 말을 지껄이는 것에서부터 말로 다 못할 광란적인 분노와 자신과 남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과오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문제꺼리들로 들어서는 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리게 된다. 실로,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 등을 피하는 것은 다른 윤리적 규범 전부를 지키는 한 방법이다. 좀더 많은 규범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재가자를 위해서는 8계와 10계, 정학녀(正學女)를 위해서는 10계, 그리고 출가 비구들을 위해서는 227가지의 계율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규범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뒤의 용어해설을 참조하기 바란다. 집중수련기간(安居) 동안의 정화(淨化) 수행을 위한 안거 기간 동안에, 약간의 행동방식에 변화를 주는 일은 수행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안거 동안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언어생활(正語)의 적절한 방식이 될 것이다. 또한 독신생활이 바른 성생활이 될 것이다. 가벼운 식생활을 하는 것은 식곤증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감각적인 기호를 구하는 일을 약화시켜 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정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또는 이러한 오후 불식(不食)이 어렵다면, 오후에는 적게 먹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담마의 맛이 세간에서 맛볼 수 있는 그 어떤 맛보다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청결함을 유지하는 일도 위빠싸나 지혜를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다. 목욕하기, 손발톱 깍기, 머리감기, 항상 발우를 깨끗이 손질하기 등의 자신의 내적인 청결을 유지해야만 한다. 외적으로는 옷과 침대가 항상 깨끗하고 말끔해야 한다. 이렇게 청결함을 지키라고 하는 이유는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여러분들이 강제로 청결해지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거 기간 동안에는 몸을 아름답게 하고 가꾸기 위한, 장식하기, 화장하기, 향수 바르기와 시간을 소비하는 일체의 행위들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이 세상에서, 행동거지를 청정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장식은 없으며, 더 큰 피난처도 없고, 위빠싸나와 지혜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또 다른 바탕도 없다. 계를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아름다움은 겉모습을 이리저리 꾸며 발라놓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음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이며, 계를 지닌 사람의 전인격을 비추어 주는 아름다움이다. 계라고 하는 덕은 모든 이에게 어울리고, 나이나 지위나 환경에 관계없이, 진실로 사시사철 그 어느 때에나 좋은 장식이다. 그러니 명심해서 여러분이 지녀야할 덕들을 항상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지니고 있도록 부탁한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들의 언어생활이나 행동거지를 어느 정도 충분히 정화했더라도 계(戒 S la)그 자체만으로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삶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보다 높은 이해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바로 그 방법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수행(meditation)이다. 수행을 위한 지침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곳은 숲 속의 나무 밑이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 수행자는 다리를 포개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앉아야 한다고 하셨다. 만일 다리를 포개어 앉는 자세가 너무 힘들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앉아도 괜찮을 것이다. 특히 등이 아픈 사람은 의자에 앉아도 좋다.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편히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편안히 앉아있을 수 있는 자세를 선택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닥과 직각이 되도록 등을 바로 세우고 앉되, 너무 뻣뻣하게 앉으면 안된다. 등을 곧게 하고 앉는 이유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앉아 있을 때, 등이 굽어 있거나 삐뚤어져 있으면, 쉽사리 통증이 오게 된다. 이것이 등을 바로 하고 앉아야 하는 한 이유이고, 더 나아가 어디에도 기대거나 보조적인 수단 없이, 등을 곧게 하려고 육체적인 노력을 하는 것은 좌선 수행에 힘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 눈은 지긋이 감는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여러분의 주의력을 배, 즉 복부에 집중시킨다. 호흡은 평상시대로 한다. 즉, 의도적으로 늦추거나 빠르게 하지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배가 불러오고, 숨을 내쉬면서 배가 꺼질 때, 여러분은 어떤 감각을 감지(感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겨냥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하나 하나의 호흡의 전 과정에 몰두하도록 단단히 마음먹는다. 일어남(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불러오는 현상에 '일어남' rising 이라는 명칭을 붙여 알아차린다)에 수반되어 있는 모든 감각을 일어남이 시작되는 그 처음 순간부터 알아차려라. 그리고 일어남의 중간 단계를 거처 마지막 단계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숨을 들여 마시는 일이 끝나면 일어나는 현상도 멈추게 되며, 호흡은 자연스럽게 내쉬는 동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숨을 내쉴 때,) 복부의 사라지는 움직임(배가 꺼지는 현상을 '사라짐' falling 이라는 명칭을 붙여 알아차린다)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감각을, 사라짐의 처음부터 중간 단계를 통해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알아차린다. 비록 우리들이 처음, 중간, 끝이라는 용어를 써서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을 설명하였으나, 이 설명은 다만 여러분들의 알아차림이 지속적이면서 철저해야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시된 것일 뿐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복부의)움직임들의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아채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나치게 겨냥한 마음overfocused mind으로 (복부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을 살피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어떻게 복부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끝나는가를 발견하려고 기대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수행법은 복부의 움직임이라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곳에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는 것이지 복부의 움직임의 원리나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복부가 호흡에 따라 일어나면 '일어남'하고 알아채고, 사라지면 '사라짐'하고 알아차리되, 일어남과 사라짐에 동반되어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채야 하는 점이 우 판디타 사야도의 가르침의 특색이다. 실제로 움직임에 따라서 일어나는 감각을 제대로 정확하게 알아채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알아채지는 감각도 미세해지게 된다. 마음집중(삼매 samadhi)과 알아차림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이 수행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노력과 정확한 겨냥precise aim을 함께 지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노력과 정확한 겨냥을 함께 지니게 되면, 마음은 감각과 직접적이고도 강하게 부딪히게 된다.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서) 정확성과 치밀성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에 대한 부드러운 정신적인 알아챔 note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감각에 대해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다. 예컨대, 복부의 움직임에 대해서 '일어남 일어남', '사라짐 사라짐'하는 말을 사용해서 마음속으로 부드럽고도 조용하게 되뇌이면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헤메임에서 되돌아오기 (가만히 앉아서 좌선하다 보면) 마음이 헤매고 돌아다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을 주시하라.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차려라.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지금 당신의 머리 속에서 오가는)생각을 '생각함, 생각함'이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조용히 알아차려라. 그리고는 다시 (수행의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일로 되돌아가라.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통해서 생겨나는 알아차림의 대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수행방식을 적용해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완전하게 집중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고 있는 도중에) 다른 대상이 생겨나서(즉, 다른 감각적 느낌이나 마음 속의 생각 등이 저절로 또는 의도적으로 생겨나서)점차로 강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상태가 되면, 우리의 모든 경험 즉, 눈으로 보이는 대상, 귀로 들리는 소리, 냄새, 맛, 몸에서 느끼는 감촉 그리고 상상할 때 나타나는 영상들이나 감정상태 등과 같은 마음의 대상들도 수행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대상들 가운데 그 어떤 대상이라도 생겨나면, 곧 바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살며시 언어적인 라벨(예컨대, '봄, 봄(seeing, seeing)', '들림, 들림(hearing, hearing)', '생각, 생각(thinking, thinking)'등의 라벨)을 사용한다. 좌선을 하는 동안에, (복부의 움직임이 아닌) 다른 대상이 알아차림에 부딪혀와서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 보다 강하게 느껴지게 되면, 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예를 들면, 좌선하고 있는 도중에, 큰 소리가 들리게 되면, 소리가 들리자마자 의식적으로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그 소리를 알아차리고, 또한 간결하게, 언어적 라벨 '들림, 들림'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경험된 소리를) 확인한다. 소리가 점차로 들리지 않게 되어 더 이상 두드러지게 경험되지 않을 때, 다시 복부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 오라. 이것이 좌선을 할 때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언어적인 라벨을 만들 때에, 복잡한 말은 필요 없다. 한 마디의 단순한 말이 가장 좋다. 눈, 귀, 혀 등의 감각의 문(을 통해서 경험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봄, 봄 … 들림, 들림 … 맛봄, 맛봄'하고 (마음 속으로) 말하면 된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에 대해서는, 따뜻함, 압력, 딱딱함, 또는 움직임 등과 같이, 좀더 서술적인 말을 선택하면 된다. 정신적인 대상들은, 갈피를 잡기 어렵게, 갖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이 마음 속의 대상들은 몇 가지의 분명한 범주 안에 다 들어온다. 즉, 생각함, 상상함, 기억함, 계획함 그리고 영상함(이 명칭들을 영어로 잘 알아두면 실제로 수행일기를 쓰거나 법사에게 보고할 때 도움이 되니 잘 보아둘 것)등의 범주에 의해 파악된다. 하지만,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라벨을 붙이는 기법을 쓰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의 목적이, 언어적인 표현의 기교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라벨을 붙이는 기법을 쓰면, (경험의) 내용에 휘말려 들지 않으면서, 우리 경험의 실제적인 특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라벨을 붙이는 기법에 의해, 정신적인 힘과 초점을 맞추는 일이 향상된다. 수행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해야할 것은 마음과 몸에 대한, 깊고, 분명하고, 정확한 알아차림이다. 이 직접적인 알아차림에 의해 우리들은, 우리의 삶에 대한 진리, 정신과 육체의 흐름의 실제적인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좌선이 끝났다고 수행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수행은 하루 내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앉는 자세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먼저 감고 있던 눈을 뜨려고 하는 의도에서부터 주위 깊게 알아차려야 한다. '의도함, 의도함 … 눈뜸, 눈뜸'하고. 의도함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눈을 뜰 때의 감각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는 (몸을 움직일 때 느껴지는)힘을 온전하게 관찰하면서, 동작의 모든 변화의 과정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일어설 때까지, 그리고 걷기 시작할 때까지를 주위 깊고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하루종일, 여러분은, 다른 모든 행동들 즉, 팔을 펴고 구부리는 동작, 숟가락을 잡는 것, 옷을 입는 것, 눈꺼풀을 닫는 것(눈을 감는 것), 먹는 것, 등등의 일상적인 행동들 전체를 알아차려야 하고 정신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을 주위 깊은 알아차림과 마음 속으로 살며시 라벨을 붙여가며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는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지니려고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이것은 그다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단지 않고 걷고 하면서 그러한 동작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던지 관찰하면 된다. 걷는 수행(行禪) 집중적인 수행(안거)기간 동안에, 하루일과 동안에, 좌선하는 시간과 같은 시간만큼 좌선하지 않는 동안에는, 걷는 수행을 하는 것 즉,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가며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시간이 표준적이지만, 45분 동안 번갈아 가며 수행해도 좋다. 걷는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25보 정도 길이의 장소를 택해서 천천히 왔다 갔다 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걷는 수행은 매우 도움이 된다. 공식적인 좌선을 하기 전에 10분 정도의 공식적인 걷는 수행을 하면,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잇점 외에도, 걷는 수행을 해서 향상된 알아차림은, 보통의 일과 시간에 몸을 여기 저기로 움직일 때, 도움이 된다. 걷는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집중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의 균형과 정확성도 향상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걷는 동안에 법(Dhamma;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아주 심오한 측면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는 깨달음도 얻게 된다 ! 사실, 않기 전에 걷는 수행을 하지 않은 수행자는 마치 다 소모되어버린 밧데리를 가지고 있는 자동차와 같다. 그 수행자는 않았을 때, 마음챙김의 엔진에 시동을 거는데 힘이 많이 들 것이다. 걷는 수행은 걷는 과정에 주위를 기울이는 일이다. 만일 꽤 빠른 속도로 걷고 있다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이라는 라벨을 붙여가며, 발의 움직임을 정신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무릎 아래 부분의 발에서 느껴지는 실제적인 감각을 따라 잡아 알아차려라. 만일 보다 천천히 걸을 때는, 각 발걸음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는 세 단계를 통해서 알아차려라. 매 발걸음마다, 걸을 때, 발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여러분은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러분이 정해놓은 거리의 끝에 도착해서 걷는 동작을 멈추었을 때, 그리고는 가만히 서있을 때, 뒤로 돌아서 다시 걷기 시작할 때, 어떤 과정들이 일어나는가 주시하라. 땅 위에 어떤 장애물이 있어서 볼 필요가 있기 전에는 발을 내려다 보지 마라. 발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도중에, 마음 속으로 발의 모양을 생각하여 지니고 있는 것은 별 도움이 안된다. 여러분은 감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야하며, 이 감각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걷는 수행 도중에 또는 일상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인) 가벼움, 얼얼함, 차가움, 따뜻함 등의 육체적인 대상들에 대해 순수하고 직접적인 지각을 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발견이 된다. 보통 우리들은 걷는 동작을 세 가지 두드러진 동작으로 나눈다. (발을) 듦, (앞으로) 나아감, (발을) 내려놓음이 그 세 가지이다. 정확한 알아차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각 동작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각 동작을 시작할 때, 살며시 정신적으로 명칭을 붙여서 알아채 가면서, 한 동작이 끝날 때까지 분명하고도 힘있게 알아차림이 따라붙고 있는가 확인해야 한다. 작지만 중요한 포인트 하나는, 발이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내려놓음이라는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감각의 세계 자, (발을) 듦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이 동작의 일상적인 명칭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수행을 할 때는, 일상적인 개념을 꿰뚫어, 발을 들려고 하는 의도를 시발점으로 해서, 많은 감각들을 내포하고 있는, 실제적으로 발을 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을) 듦의 전 과정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을 드는 것을 알아차리려는 우리의 노력은, 너무 강해서 (발을 드는 동작과 함께 일어나는) 감각을 벗어나서도 안되고, 너무 약해서 이 표적에 못 미쳐서도 안된다. 정확하고 정밀한 정신적인 겨냥이 있을 때, 우리의 노력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노력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하지도 않게) 잘 균형 잡혀 있고, 겨냥이 정확할 때, 마음챙김은 알아차림의 대상에 굳건하게 자리잡게 된다. (균형 잡힌) 노력(正精進)과, (대상에 대한 겨냥의) 정확함(正思惟)과, (굳건한) 마음챙김(正念)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 있을 때라야만, 마음집중(正定)이 계발된다. 물론, 마음집중은 마음이 모아진 상태,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집중의 특징은 의식이 분산되고,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발을) 드는 과정에, 보다 더 밀착해서 관찰해보면, 그 과정은, 마치 일렬로 줄을 지어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개미떼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멀리서 개미떼의 행렬을 보면,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가까이 가서보면 꾸물거리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보다 더 가까이 가서 보면, 행렬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로 보일 것이며, 하나의 줄이라고 생각했던 관념은, 단지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개미의 행렬이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앞뒤로 이어져 있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각하게 된다. 바로 이와 똑같이, 발을 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볼 때, 우리들이 '꿰뚫어 보는 지혜(insight)'라고 부르고 있는 정신의 요소 또는 의식의 자질은, 관찰의 대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꿰뚫어보는 지혜가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될수록, 발을 드는 과정의 진정한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 꿰뚫어보는 지혜가 생겨나서 위빠싸나라는 꿰뚫어보는 수행을 통해서 더욱 예리해질 때, 존재에 대한 독특한 진리의 여러 양상들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서 드러난다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정해진 순서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향상(progress of insight)이라고 한다. 수행자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첫 번째의 꿰뚫어보는 지혜는, 다음과 같이 생겨난다. 즉, 분명히 구분되는, 그리고 짝을 이루면서 함께 생겨나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에 의해서, 발을 드는 동작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 지적이거나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주 직관적으로 - 이해하면서 첫 번째의 꿰뚫어보는 지혜(名色區別知;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물질적 현상인 육체적인 감각은, 그것과는 다른, 정신적 현상인 알아차림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정신적 현상들과 육체적 감각들이 서로 이어져서 일어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마음과 육체 사이의 조건적인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발을 들려고 하는 의지(정신적 현상)때문에 육체의 움직이는 감각(육체적 현상)이 생겨날 때, 우리는 엄청난 신선감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마음이 육체적 현상을 유발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강한 열기(육체적 현상) 때문에, 걷는 수행을 그늘진 곳에서 하고자 하는 바램(정신적 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는 육체적인 것이 마음을 유발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육체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은 아주 다양한 형태들을 파악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앎이 생겨나면, 우리의 삶은 이전에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단순하게 보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육체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원인과 결과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체인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전통적인 꿰뚫어 보는 지혜의 향상(progress of insight)에 있어서 두 번째의 꿰뚫어 보는 지혜(조건을 식별하는 지혜)이다. 마음집중이 향상됨에 따라, 발을 들어올리는 현상은, 무상(無常)하고, 개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며(無我), 놀라운 속도로 하나 하나의 현상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것임을 보다 깊이 있게 보게 된다. 이것이 다음 단계의 꿰뚫어 보는 지혜(生滅知;현상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로써, 집중된 알아차림에 의해 직접적으로 (현상의 생멸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한다. 발생하는 현상 뒤에 그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같은) 불변하는 실체 없이, 현상들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났다가는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움직임과 개별성이라는 환상은 마치 영화와 같다. 보통의 지각상태로 보면, 영화는 세상과 모두 닮은 인물들과 사물들로 가득 차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필름을 천천히 돌려보면, 영화는 실제로는 하나 하나 떨어져 있고, 정적(靜的)인 필름의 토막으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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