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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satipatthana-sutta(大念處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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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09년 02월 13일 (14:18)조회수조회수 : 2,966
Mahasatipatthana-sutta(大念處經)


냐나틸로카 엮음/ 김재성 옮김


[여기에 소개하는 『대념처경』은 냐나틸로카 스님의 『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 가운데 바른 마음챙김[正念]에 대한 부분을 김재성 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옮긴이 김재성 님의 사전 허락을 받아 팔리문헌연구소 체재로 재편집하여 여기에 싣게 되었습니다. 본 사이트에 이 자료를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김재성(정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내용은 냐나틸로카 엮음·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 (서울: 고요한 소리, 2002)으로 이미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옮긴이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 http://cafe.daum.net/vipassana에 한글 파일로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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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캄마사담마라고 하는 쿠루 족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하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하나의 길[ekayano maggo]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비구들이여, 여기[이 가르침]에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受念處]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3)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그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1.1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서,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 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단단히 하여 앉는다. 그리고는 마음을 챙겨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챙겨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pajanati),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sikkhati)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마치 도자기공이나 그의 도제가 원반을 돌릴 때, 오랫동안 돌리면서는 '오랫동안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며, 짧게 돌리면서는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대념처경』주석서의 보충설명; '몸이 있다'라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 현상만이 있지, 거기에 중생, 인격체, 여자, 남자, 자아는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몸에는 자아에 속한 것이나, 자아나, 인격체에 속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1]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은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방법은 위빠싸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 단계나,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계발하는 방법이나 위빠싸나와 선정 의 양쪽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지금 이 『대념처경』에서의 출입식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될 위빠싸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단계로서의 마음집중과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정기적인 출입식념의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마음의 고요와 마음집중(사선 가운데 한 가지의 선정)을 얻은 후, 수행자는 호흡의 시작(origin of breath)을 검토한다. 그는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다섯 감각기관과 같이 사대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물질적인 현상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육체[色]에 의해서 호흡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인상[觸]으로부터 인식[識]이 생겨나고, 이 인식과 함께 오온(五蘊)의 나머지 세 가지 요소인 느낌[受], 표상작용[想], 의지작용[行]이 생겨난다는 사실도 통찰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른바 인격체라고 불리는 에고라는 실체 또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요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는 육체와 마음의 흐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본다. 그런 후, 그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세 가지 특성을 적용시켜서, 그것들을 전적으로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中部』118經 『出入息念經』과『淸淨道論』8장을 참고하기 바람.

1.2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


또한 비구들이여, 걸어갈 때는“걸어간다”라고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이외의 다른 몸의 동작이 있을 때, 그러한 동작을 그때그때 알아차린다.[2]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3 분명한 앎[正知]


또한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들아 갈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사(승복)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3]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4 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육신을 아래로는 발바닥에서 위로는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피부로 덮여져 있으며 가지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
비구들이여, 마치 위아래 양쪽에 구멍이 나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벼, 보리, 녹두, 콩, 깨, 쌀 등이 들어있는 경우, 이 자루를 눈이 있는 사람이 풀어보고서“이것은 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녹두, 이것은 콩, 이것은 깨, 이것은 쌀이라고 직접 관찰하는 것과 같이,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직접 관찰한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으로.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4]

1.5 네 가지 요소[四大; 地水火風]에 대한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이 육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구성되어진 그대로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해서 사거리의 큰길에 부위별로 해체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5]

1.6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관찰 [부정관(不淨觀)][6]

① 첫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된 시체가 부풀어오르고, 검푸러지고, 썩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② 두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재칼 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의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③ 세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④ 네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⑤ 다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⑥ 여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⑦ 일곱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⑧ 여덟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⑨ 아홉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썩어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7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열 가지 이익[7]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 k yagat sati]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다음의 열 가지 이익이 기대될 것이다.
(1)불쾌함과 즐거움을 제어하게 되어 불쾌함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불쾌함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불쾌함을 극복하며 지낸다.
(2)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게 되어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공포와 두려움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낸다.
(3)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등에, 모기, 바람, 햇빛, 기어다니는 벌레등과 접촉할 때 견디어 내게 되며, 험담이나 불쾌한 말, 고통스럽고 통증이 심하며, 살을 애는 듯한 괴로움이나, 뼈를 깍아내는 듯한 괴로움, 의견의 불일치, 고뇌 그리고 생명에의 위협을 견디어 내게 된다.
(4)어려움이나 곤란함 없이 자신의 의지의 따라서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얻을 수 있다, 사선은 마음이 정화된 높은 경지이며, 사선을 얻으면 바로 여기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된다.
(5)여러 가지의 신통력을 얻게 된다. 몸이 하나의 상태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며, 여럿인 상태에서 하나로 되기도 한다.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며, 벽이나 사방이 가로막힌 곳을 가로질러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도 하고, 마치 빈 공간을 지나가듯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마치 물 속으로 잠수하듯이 땅 속으로 들어가며, 마치 땅 위를 걷듯이 물위를 빠지지 않고 걸어간다. 가부좌를 한 채로 새처럼 공중을 날아가며, 손으로 달과 태양을 만질 정도로 신통력이 생긴다. 범천의 세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그의 신통력이 미치게 된다.[神足通]
(6) 인간의 귀를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귀(청각기관)로 천상과 인간세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나는 소리나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나.[天耳通]
(7)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탐심에 물든 마음을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알며, 탐심이 없는 마음을 탐심이 없다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인색한 마음을, 인색한 마음이라고 알며,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면 인색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안다.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에 의해) 고양된 마음을 고양된 마음이라고 알며, 고양된 마음이 없으면, 고양된 마음이 없다고 안다. 보다 뛰어난 마음을 뛰어난 마음이라고 알며,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으면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다고 안다.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을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된 마음을 집중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他心通]
(8) 자신의 수많은 과거 전생에 대해서 기억한다. 즉, 한 생이나 두 생 .....등등의 과거생의 자신의 이름, 태생, 모습, 생전의 경험 내용,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 등을 기억하게 된다.[宿命通]
(9) 인간의 눈을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눈(시각 기관)으로 뭇 중생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가 나쁜 곳에 태어나는가, 잘 생겼는가 추하게 생겼는가,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보게 된다. 이처럼 그는 중생들이 자신의 행위[業].에 따라서 받게 되는 삶의 양태를 알게 된다.[天眼通]
(10) 모든 번뇌를 없애 버려서,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증득해서 깨달아 완성을 이루어 지낸다.[漏盡通]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위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中部』119, 『身念經』MN III, 97-99.

* 열 가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 가운데 뒤의 여섯 가지(5에서 10까지)의 이익은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세간적인 조건들이어서 범부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의 여섯 번째의 누진통은 (번뇌를 모두 제거한) 출세간적인 신통력으로서 아라한만이 지니는 덕목이다. 네 가지의 마음집중[四禪]을 이룬다면 다섯 가지의 세간적인 신통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통력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네 가지 신족(神足)이 있다.[8]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受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정신적인(비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느낌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9]

3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또는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성냄이 있는 마음[有瞋心]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有癡心]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침체된 마음을 침체된 마음이라고 알며,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으로) 커진 마음[大心]을 커진 마음이라고 알며,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 수행이)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알며, 향상이 안된 마음을 향상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을 잘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된 마음을 집중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解脫心]을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알며,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 여기에서 사용된 마음(citta)이란 마음 또는 의식의 순간들(moments of consciousness)을 통틀어서 일컫는 집합적인 용어(collective term)이다. 인식작용[識; vinnana]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마음 또는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고(思考; thought)라고 번역해서는 안된다. 사고(思考)와 생각함(thinking)은 마음의 언어적인 작용, 즉 거친 생각[尋]과 미세한 생각[伺]에 해당하며, 형성작용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이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마음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10]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다섯 가지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4.1 다섯 가지 덮개[五蓋]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惡意,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惡意)가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가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가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악의가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악의가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혼침과 졸음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우울)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한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들뜸과 회한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회의적 의심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11]

4.2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이것은 물질적 현상[色]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감수 작용[受]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표상 작용[想]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형성 작용[行]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인식 작용[識]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3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여기에 비구가 눈[眼; 시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색[色; 시각 대상으로서의 모양과 색깔]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結; samyojana][12]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귀[耳; 청각기관]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코[鼻; 후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혀[舌; 미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몸[身; 촉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마음[意; 사고 기관]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현상[法]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13]

4.4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n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dhamma-vicaya -sambojjhan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viriya-sambojjhan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iti-sambojjhan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passaddhi- sambojjhanga]가 있을 때,‘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samadhi-sambojjhan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upekkha-sambojjhanga]가 있을 때,‘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14]

4.5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yathabhutam]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15]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16]

4.6 네 가지 마음챙김의 이익 - 마음챙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보증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7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不還]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7년은 걸리지 않아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6년간, ... 5년간, ... 4년간, ... 3년간, ... 2년간, ... 1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1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7개월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개월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6개월간, ... 5개월간, ... 4개월간, ... 3개월간, ... 2개월간, ... 1개월간, ... 반달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7일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마음의 언짢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라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은 설하셨다. (설법을 들은) 그 비구들은 만족해하며, 세존의 설법에 대해 환희에 찼다.[17]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290-315

Notes:
1) 존재하는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물질적인 현상들로서의 '육체'와 이 물질적인 현상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만이 있다. 하지만 이 때의 정신적인 현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남자, 여자, 인격체, 자아 등은 발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현상과 육체의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DN-a III, 765.] [Return to text]

2) 위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대한 팔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걸어간다”, “나는 서 있다”,“나는 앉아 있다”,“나는 누워 있다”라고 번역해야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주어인 “나는”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이 실제의 수행에 비추어 볼 때 더욱 적합한 표현이므로 주어는 전부 생략했다. 팔리어나 영어와 같은 印歐語에서는 문장의 문법적인 구조 상 주어가 생략되지 않지만, 실제의 수행에서는 행위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의 설정이 없어도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이 가능하며, 결국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수행의 한 목적이라 할 때,“나”라고 하는 행위의 주체를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됨을 알 수 있다.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나”라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단지 정신적인 현상(名)과 육체적 혹은 물질적인 현상(色)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은 정신적인 현상(名)과 육체적 혹은 물질적인 현상(色)일 뿐, 어디에서도 실체적인 “자아”는 발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적인 동작이나 행위에 마음을 챙겨 알아차릴 때, 처음부터 “나는”또는 “내가”라고 하는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은 실제의 수행에 있어서 중요하다. 실제로 행주좌와 등의 동작을 알아차릴 때, 간단하게 “걸음”,“서 있음”,“앉음”,“누움”이라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된다.] [Return to text]

3) 분명한 앎(正知)의 절(節)은 앞의 행주좌와의 동작에 대한 마음챙김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일상의 모든 육체적인 동작과 행위를 할 때에는 반드시 분명한 앎이 동반되어야 함을 제시되어 있다.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관계이다. 마음챙김이 있으면, 분명한 앎이 있고, 분명한 앎이 있으면 반드시 마음챙김이 동반되어 있다. 마음챙김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그 대상에 대해서 순간 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라 한다면. 분명한 앎은 마음챙김과 동반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파악을 의미한다. 수행자 특히, 일정 기간의 집중적인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에 드는 순간까지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자신의 육체적인 모든 행위와 동작에 마음을 챙기고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한다. 한 순간의 방심도 없이 마음챙김이 이어질 때, 마음집중(定)과 지혜(慧)가 성숙하기 시작한다.] [Return to text]

4) 현재의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위에서 설해진 육신의 32가지 부분에 대한 관찰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부정관(不淨觀)의 일환으로 제시되어 있는 육신의 32가지 구성부분에 대한 관찰은 마음집중(禪定)을 닦는 수행에서 실천되고 있다. 현재에는 태국의 아찬 먼(Ajhan Mun, 1870-1949) 스님의 전통을 따르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실천되고 있다.] [Return to text]

5)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은 현재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1904-1982)의 전통에 따르는 위빠싸나 수행의 토대가 되는 수행의 방법이다. 마하시 스님의 위빠싸나 수행의 특징은 좌선을 할 때, 들숨과 날숨(出入息) 에 마음을 챙기는 출입식념(出入息念)을 택하지 않고) 호흡에 동반되어 발생하는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 하겠다. 호흡이라는 자연스런 생명의 현상에 따라 발생하는 복부의 팽창과 수축에 마음을 챙겨서 바로 이 복부의 움직임이 다름 아닌 바람의 요소(風界)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가면서 마음집중과 지혜를 동시에 향상시켜나가는 것이 마하시 스님의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적인 좌선의 방법이다. 물론 좌선 이외의 동작을 할 경우에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모든 동작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하시 스님의 수행법은 마하시 스님 이전에는 일반화되지 못한 채 몇몇 수행승들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으나,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현재에도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닦는 수행법이 바로 마하시 스님이 일반화한 위빠싸나 수행법이다. 미얀마에는 마하시 수행법이외에도 손꼽을 수 있는 몇몇의 수행법이 현재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들 사이에서도 실천되고 있다.] [Return to text]

6) 현재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권에서도 위에서 설하진 묘지에서의 부정관 수행은 할 수가 없다.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묘지에서의 시체에 대한 관찰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태국에서는 스님들에게 의과 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의 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는 태국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태국의 동북 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30대 중반에 죽은 여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방콕의 교외에 있는 한 수행처에서는 죽은 시체 네 구(남녀 각각 두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죽은 시체나 백골을 보면서 하는 수행의 전통은 현재 미얀마의 위빠싸나 수행법에서는 그다지 가르치지 않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동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수행처에서 위빠싸나 수행을 위한 예비 단계로서의 사마타 수행의 한 대상으로 실천되고 있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관찰[부정관] 수행의 핵심은 수행자 자신이 자신의 육체의 속성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서 육신에의 집착과 욕망을 극복하는 데에 있다. 이상으로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의 설명이 마무리된다.] [Return to text]

7) 냐나틸로카 스님이 정리한「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 kayagatasati]」의 열 가지 이익은 『대념처경』의 내용이 아니라, 별도의 경전인 『중부』의 『신념경(身念經)』Kayagatasati-sutta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신념경(身念經)』은 『대념처경』의 「몸에 대한 마음챙김」부분만이 제시되어 있는 독립된 경전이지만, 몸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이 선정(禪定) 수행으로 이어지는 면이 중심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Return to text]

8) 몸에 대한 마음집중 수행을 통해 네 가지의 마음집중[四禪]을 이룬다면, 바로 이 선정의 힘으로 다섯 가지 세간의 신통력과 더 나아가 출세간의 누진통(漏盡通)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Return to text]

9) [네 가지의 마음챙김」 가운데에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이 「몸에 대한 마음챙김」 뒤에 설해져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집중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경우와 일상생활에서의 경우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1) 집중수행의 경우
집중적인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생겨나는 감각적인 느낌을 생생하게 파악하게 된다. 우선적으로는 육체적인 느낌(주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특히 초보자의 경우, 좌선을 할 때에는 다리의 통증이나, 등의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때, 통증이 느껴지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몸에서 통증이 생기면, 바로 그 통증을 제거하기 위한 조건 반사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수행 도중에도 이러한 조건 반사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감각적인 느낌의 본질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수행은 자극에 대해서 반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 자체를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다리의 통증이나 등의 통증이 있을 때, 견디어 낼 수 있을 때까지 견디면서(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것) 느낌 자체를 관찰하면서 그 본질을 알아 차려야 한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등의 자극을 반사적인 반응 없이 알아차려 나갈 때, 그 느낌들의 본질을 직접 이해하게 된다. 즉 모든 느낌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서, (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본질을 자신의 관찰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생기면, 고통을 견디어 내는 힘도 강해지고, 즐거운 느낌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수행 도중에는 마음의 집중이 향상함에 의해서 강한 기쁨이나 희열 등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때 경험하는 기쁨도 생겨나는 순간에 관찰해야 하는 대상일 뿐, 붙들고 집착할 대상은 아니다. 좋은 경험도 결국은 사라지는 경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들을 집착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관찰해 나갈 때, 지혜가 성숙해 가는 것이다. 느낌은 지혜를 계발하는 재료이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은 일차적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2)일상생활에서의 느낌에 대한 관찰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갖가지 감각적인 자극들로 가득 차 있다.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은 무방비 상태로 개방된 채 수많은 자극들을 소화도 시키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들을 정리도 못한 채, 이리저리 헤매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다.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더욱 그 느낌을 얻으려 하고, 불쾌한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탐욕과 성냄이 생겨나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이라는 마음의 번뇌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에 의해서 생겨난다. 즉 번뇌의 원인은 느낌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느낌을 없앨 수는 없다. 느낌은 감각 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느낌 자체가 아니라 느낌에 대한 집착과 거부감이다.
예를 들면, 여름철의 무더위 때문에 육체의 불쾌한 느낌이 생긴다. 이 불쾌한 느낌 때문에 정신적인 짜증이 생기고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처럼 육체의 불쾌감이 정신의 불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일상에서 언제나 경험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려 하고 탐욕과 성냄이라는 마음의 번뇌를 덜어내려면, 느낌에 의해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잘 이해해서, 느낌 뒤에 번뇌가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여름은 더운 계절이라는 상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 더위를 정신적으로 견디어 내는 힘이 생겨날 것이다. 느낌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그 느낌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Return to text]

10) 냐나틸로카 스님의 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의식의 순간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사소한 마음의 변화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는 수행중의 수행자의 마음 또는 의식의 순간들을 가리키고 있다.
마음 또는 의식이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순간 순간의 마음의 총체를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은 순간 순간 변하므로 동일한 두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마음을 만들어낸 조건도 변하므로, 동일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동일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마음을 어떤 범주를 정해서 편의상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경전에 설해진 마음의 범주를 후대의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정밀하게 분류하였다. 아비달마 불교의 분류는 지면상 생략하지만, {大念處經}의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에서 제시된 마음은 16가지의 마음의 범주임을 알 수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근본적인 번뇌와 관계된 마음과 수행과 관계된 마음의 순간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경전을 듣는 청중이 수행승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수행 도중에 경험되는 마음의 순간들에 대한 언급이 자세히 설해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요점은 수행 도중에 경험하는 마음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을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라고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게 되면, 생겨난 탐심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수행의 힘이 약한 일상의 마음으로는 탐심이 있다는 점을 알아도 그 탐심을 다루는 법에 능숙하지 못하므로 탐심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마음챙김의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탐심이 일어나는 순간 탐심을 알아차려 탐심의 진행은 차단된다. 알아차리는 순간 탐심은 끊어져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에 의해 생겨난 지혜의 힘에 의해서 번뇌가 제어되는 과정이다. 탐심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탐심이 없는 마음이라는 긍정적인 마음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즉, 탐심을 알아차린 후 탐심이 사라졌으면, 탐심이 사라졌음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부정적인 마음들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긍정적인 마음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긍정적인 마음도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또 다른 탐심(부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면, 생겨났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정적인 마음도 긍정적인 마음도 거부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챙김(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때, 수행은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생겨나고 경험된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은 아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긍정적인 요소가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좋은 마음의 순간들은 수행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향상된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지니는 것은 수행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순간 순간의 마음을 잘 살피고 마음챙김을 굳게 지닐 때, 부정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마음은 청정해지며, 더욱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의 이로움은 바로 스스로 청정해지며,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얻은 지혜의 힘으로 최상의 행복인 열반을 얻는 데에 있는 것이다. [Return to text]

11) 「네 가지 마음챙김」 가운데 네 번째의 「법에 대한 마음챙김」에 대한 부분은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과 장애, 수행 도중에 경험하는 현상들 그리고 마지막 목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앞서 설해진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受念處),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등의 수행의 전 과정이 요약 정리되어 제시되면서, 초기불교의 주요 교설인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져 있다. 법념처(法念處)에서는 이처럼 5 가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이 설해지고 있으나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법념처에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삼는 수행의 대상 또는 주제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전체인 오온(五蘊)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가 처음 부딪히는 문제가 다섯 가지 덮개[蓋; 욕망, 악의(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우울), 회의적 의심]다. 일차적인 수행의 대상인 육체적인 현상(좌선 시에는 호흡이나 호흡에 동반되어 발생하는 복부의 움직임이며, 행선(걷는 수행)시에는 들어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는 동작임)을 마음챙겨서 알아차리다가 마음에서 수행에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생기면 생기는 바로 그 즉시 알아차리고 알아차린 후 이 장애들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이 부분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적인 수행을 하지 않을 때에도 다섯 가지 덮개는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번뇌이므로 항상 주의 깊게 살펴서 마음에서 생겨난 이러한 번뇌들이 주인 노릇을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번뇌를 차단시키려면 항상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기민한 마음챙김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챙김이라는 문지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각가지 번뇌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번뇌라는 정신적인 현상으로서의 법을 생겨날 때 그리고 사라질 때 즉시 즉시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챙김에 의거한 위빠싸나 수행에서의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한 부분이다. [Return to text]

12) 여기에서의 족쇄란 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해서 생겨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착[欲貪, kamaraga]의 속박과 성냄[瞋, patigha], 아만심[慢, mana], 잘못된 견해[見, ditthi], 회의적인 의심[疑, vicikiccha], 계와 금기에 대한 집착[戒禁取, silabbata-paramasa], 존재에 대한 탐착[有貪, bhavaraga], 질투[嫉妬, issa], 인색[吝嗇, macchariya], 어리석음[無明, avijja]이라는 열 가지 속박이라고 주석서에서 말하고 있다.  [Return to text]

13)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져 있는 법에 대한 마음챙김(法念處)의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바탕으로 하여 수행하는 위빠싸나 수행의 대상 또는 주제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물질적) 현상을 세분한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이다. 다섯 가지 무더기로 제시된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그 순간 바로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한 위빠싸나 수행의 비결이다. 즉, 끊임없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을 바로 그 생멸의 순간에 포착하는 것이 마음챙김이며, 이러한 마음챙김이 있을 때, 현상들에 대한 바른 이해인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에 대한 항목에서는 이처럼 생멸하는 심신의 현상을 하나도 빠트림 없이 마음챙겨서 알아차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세 번째 항목인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六內外處)에 대한 마음챙김에서는 인식 기관이 인식 대상과 부딪힐 때 생겨나는 번뇌를 다스리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순간 마음챙김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탐욕과 싫어함이라는 번뇌가 생겨나서 번뇌에 의해서 속박되어 버리고 만다. 이때, 번뇌가 생겨났으면 생겨났다고 바로 알아차리면, 그 번뇌는 끊어지게 된다. 번뇌가 끊어지면, 바로 번뇌가 끊어졌다고 알아차리고 다시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돌아와서 마음챙김에 틈이 없게 해야 한다. 번뇌가 생겨나는 관문인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챙김이라는 문지기를 감각기관의 문에다 굳게 세워 놓는 것이다. 마음챙김이 굳게 자리하고 있을 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등의 인식이 생길 때, 마음을 얽어매는 족쇄인 번뇌는 생기지 않는다. 마음챙김이라는 하나의 방패가 있을 때, 온갖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Return to text]

14) 다섯 가지 덮개를 극복하면서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관찰하는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며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마음챙김(念覺支)이 더욱 예리해지고,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法)에 대한 이해(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精進覺支). 마음에서 강한 기쁨을 맛보기도 하며(喜覺支), 마음과 몸은 편안해지고 안정된다(輕安覺支). 기쁨을 맛보고 편안해진 마음은 더욱 집중을 이루게 되며(定覺支),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심신의 온갖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의 평온이 유지된다(捨覺支).
수행이 진전되면서 생겨나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가 경험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수행의 핵심은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들도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경험되면 바로 알아차리고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는『청정도론』에서 제시된 위빠싸나를 닦는 수행자가 경험하게 되는 10 가지 번뇌(十觀隨染)와 대조해보면 흥미롭다.
10 가지 번뇌(十觀隨染)란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수행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번뇌 3 위빠싸나 10 가지 번뇌를 참조)
①光明 obhasa, ②知 nana, ③喜 pit), ④輕安 passaddhi, ⑤樂 sukha, ⑥勝解 adhimokkha, ⑦努力 paggaho, ⑧現起 upatthana, ⑨捨 upekkha, ⑩欲求 nikanti.
수행 도중에 위와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미세한 욕망이 마음에 있는가를 잘 살펴서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번뇌라고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수행을 해 나아가야 한다. 10 가지 위빠싸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와의 차이는 집착 또는 욕망이라는 번뇌에 있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와 같이 수행을 통해서 얻은 좋은 현상에도 집착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10가지 위빠싸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서 찾아볼 수 있다. [Return to text]

15) 『장부(長部)』의 『大念處經』에서 상세하게 설해져 있는 사성제의 자세한 내용에 대한 부분 (DN II, 305-313)은 『중부(中部)』의 『念處經』을 인용하고 있는 냐나틸로카 스님의 편집에 따라서 생략한다.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해설하고 있는 경전으로는 『장부』의 『大念處經』과 함께 『중부』의 『念處經』(MN I, 55-63)이 있다. 이 두 경전의 차이는 바로 사성제에 대한 설명에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음에 반해서 『念處經』은 위와 같이 간단하게 사성제에 대한 항목만이 설해져 있다.
사성제는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교설이다. 불교는 다름 아니라 괴로움(苦)이라는 인간의 현실 상황에 대한 파악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이상(涅槃)을 설한 가르침이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Return to text]

16)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 대한 마음챙김을 끝으로 네 가지 마음챙김 수행에 대한 설명이 막을 내렸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듯이 사성제에 대한 마음챙김도 이론적으로 사성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마음챙김이 마지막에 제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세 번째의 고귀한 진리인 열반의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므로, 마음챙김 수행도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체험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열반의 체험은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아라한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Return to text]
17) 『대념처경』과 『염처경』은 마지막으로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수행 기간에 대해서 설하면서, 마음챙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보증하고 있다. 7년간의 긴 시간과 7일이라는 짧은 기간의 차이는 개개인의 수행의 차이에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현재 이 생에서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붓다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그 길을 각자 자신의 발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붓다는 길을 가리키는 분이다. [Return to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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