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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혹은 정신계발(BHA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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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09년 02월 13일 (14:19)조회수조회수 : 2,609
명상 혹은 정신계발(BHAVANA)


월폴라 라훌라 지음·이마성 옮김

[이 자료는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Chapter VII 'Meditation' or Mental Culture: Bhavana, pp.67-75를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명상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잘못된 견해들
붓다는 말했다. "비구들이여, 두 종류의 질병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무엇인가? 육체적 병과 정신적 병이다. 일이년간 … 심지어 백년간이나 그 이상 동안 육체적 병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정신적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즉 아라한들을) 제외하고는 한 순간 동안만이라도 정신적 병으로부터 자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드물다.[A. (Colombo, 1929), p.276.]
붓다의 가르침, 특히 명상법(瞑想法)은 완전한 정신적 건강, 평형 및 적정(寂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붓다의 가르침 중 어떤 다른 분야도 '명상'만큼 불교도와 비불교도 모두에 의해서 그렇게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은 불운이다. '명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활동으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한다. 즉 사회로부터 격리된 어떤 먼 장소에 있는 사원의 독방이나 어떤 동굴에서 석상처럼 특수한 자세를 취하는 것, 그리고 일종의 신비 혹은 불가사의한 생각이나 황홀경에 몰입하거나 그에 대한 명상에 잠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명상은 삶의 도피가 아니다
진정한 불교적 명상은 전혀 이러한 형태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너무 그릇되게 혹은 너무 적게 이해되어서 훗날 이 '명상법'은 거의 기계적으로 판에 박힌 일종의 의례나 의식으로 저하되고 퇴보되었다.[18세기 경 세일론에서 씌어진 명상에 관한 저술 The Yogavacara's Manual (T.W. Rhys Davids편, London, 1896)은 그 당시의 명상이 암송형식이나 촛불의식으로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제3의 눈'과 같은 어떤 영적(靈的) 신비적 능력을 얻기 위해서 명상이나 요가에 관심을 가진다. 얼마전 인도의 한 비구니는 자신의 귀를 통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자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때도 여전히 완전한 시력의 능력을 소유했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정신도착'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능력에 대한 탐욕, 즉 갈애의 문제다.
영어의 메드테이션(meditation, 명상)이란 단어는 수양 혹은 발전, 즉 정신적 수양이나 정신적 발전을 의미하는 원어 바와나(Bhavana)의 대단히 빈약한 번역이다. 바와나란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의미의 정신수양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욕망, 증오, 악의, 게으름, 근심, 걱정, 회의와 같은 불순함과 어지러움을 깨끗이 하고, 정념(正念), 직관, 총명, 의지, 정력, 분석력, 확신, 기쁨, 적정 등과 같은 자질을 계발하여 마침내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보고, 궁극 진리인 열반을 깨닫는 최고 지혜의 성취로 이끈다.

두 가지 형태의 명상
두 형태의 명상이 있다. 하나는 경전에 기술된 여러 방도로 공무변처(空無邊處)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와 같은 최고의 신비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삼매(三昧)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개발하는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이 모든 신비로운 상태는 마음에서 창조되고 마음에서 만들어지며,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이것들은 실재, 진리, 열반과는 관련이 없다. 이런 형태의 명상은 붓다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순수하게 불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불교적 명상의 영역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의 실현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붓다도 깨닫기 이전에는 여러 스승 밑에서 이러한 요가 수행을 공부하고 지극히 높은 신비의 경지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경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들이 완전한 해탈을 주지도 않았고 궁극적 진리에의 통찰력을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러한 신비의 경지를 단지 이생에서의 행복한 삶 혹은 평온한 삶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보았다.[中部經典의 sallekha-sutta(No. 8)를 보라.]
그래서 붓다는 완전한 마음의 해탈과 궁극 진리인 열반의 실현으로 이끄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 즉 위빠사나(vipassana, 觀法)로 알려진 다른 형태의 명상법을 발견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불교적 명상법, 불교적 정신수양이다. 이것은 정념(正念), 직관, 주의, 관찰에 바탕을 둔 분석적 방법이다.
단 몇 페이지 내에 이런 광범위한 주제를 정확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단지 진정한 불교적 명상, 즉 정신수양 혹은 정신개발에 관해 실질적 방식으로 간결하고 개략적으로 개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염처(念處)
정신계발 '명상'에 관해 붓다가 준 가장 중요한 설법은 사띠빳타나 숫따(Satipatthana-sutta, 念處經)이다. 이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지극히 존중되었기 때문에 불교 사원뿐만 아니라 불교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둘러 않아 경건하게 귀기울이는 가운데 규칙적으로 암송되었다. 비구들은 죽어 가는 이의 머리맡에서 그의 마지막 생각을 정화하기 위해 자주 이 경전을 암송한다.
이 설법에 나타난 명상법은 삶과 단절되지도 않았고, 삶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적 행위, 우리의 슬픔과 기쁨, 우리의 말과 생각, 우리의 도덕적 지적 활동과 모두 관련되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네 가지의 중요한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우리의 육체, 둘째는 감정과 감각, 셋째는 마음, 넷째는 다양한 도덕적 지적 주제를 다룬다. 어떠한 형태의 명상이든 본질적인 것은 정념, 주의, 집중이나 관찰임을 분명히 명심해야만 한다.

호흡에 관한 명상
신체와 관련된 명상의 가장 잘 알려지고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수행의 하나는 수식관(數息觀, anapanasati)이라 한다. 이 특정하고 분명한 자세가 경전에 규정된 것은 오직 이 명상을 위한 것 뿐이다. 경에서 말한 다른 형태의 명상을 위해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눕거나 하면 된다. 그러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집중하는 훈련을 위해서는 경전에 따라서 발을 포개고 앉아야만 하며,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정신을 바짝 차려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발을 포개고 앉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람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비실용적이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발을 포개고 앉기가 불편한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서 몸을 곧바로 세우고 정신을 집중해도 된다. 명상자가 똑바로 앉되 경직되어서는 안되며, 그의 손은 무릎 위에 편안하게 놓는 것이 이 연습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이렇게 앉아서 당신에게 편리한 대로 눈을 감을 수도 있고 코끝을 응시할 수도 있다.
당신은 밤낮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만,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단 1초 동안도 호흡에 당신의 마음을 집중하지 않는다. 이제 당신은 오로지 이 일에만 집중하라. 어떠한 노력이나 긴장 없이 평소대로 숨을 쉬어라. 당신의 들숨과 날숨에 당신의 마음을 집중하라. 당신의 마음으로 들숨과 날숨을 주시하고 관찰하라. 당신의 마음으로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고 주의를 기울여라. 숨쉴 때 때로는 깊은숨을 쉬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숨쉬도록 하라. 다만 깊은숨을 쉴 때 그것이 깊은숨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달리 말하자면 호흡에 충분히 마음을 집중시켜 그 움직임과 변화를 알도록 해야 한다. 다른 모든 일, 주변 상황, 환경을 잊어라. 눈을 들어올리지 말고 어떤 것도 보지 말라. 5분 내지 10분간 이렇게 하도록 노력하라.
처음에는 호흡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이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산란해지는지 놀랄 것이다. 마음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러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소리를 듣는다. 마음은 혼란 되고 어수선해진다. 그리하여 곧 실망하고 낙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한 번에 5분 10분간 계속 연습하게 되면 점차 조금씩 마음을 호흡에 집중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 후에 마음이 호흡에 완전히 집중되어서 주변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당신에게 어떤 외부 세계도 존재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나누어진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이 미세한 순간은 당신에게는 기쁨과 행복과 고요함으로 가득 찬 전율할 만한 경험이기에 계속 수행할 마음이 일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규칙적으로 실행한다면 점점 더 오랜 시간 동안 그 경험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호흡에 마음을 집중시켜서 완전히 자신을 잊는 순간이다. 자신을 의식하는 한 어떤 것에도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다.
아주 간단하고 용이한 실행 방법의 하나인 호흡에의 집중 연습은 드높은 신비 경지에 이르게 하는 집중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집중력은 열반의 실현을 포함하여 사물의 본질에 관한 가장 깊은 이해, 통찰, 직관에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과 별개로 이러한 호흡법은 즉각적인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육체적 건강, 편안한 휴식, 숙면 및 일상 생활에서의 효율성 등에 효과적이다. 이것은 고요함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흥분해 있거나 신경질이 나 있을 때조차 몇 분간만 호흡을 행한다면 곧 마음이 가라앉고 평화로워짐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충분한 휴식 후에 깨어났을 때처럼 느끼게 된다.

행위에 대한 집중
'명상'(정신 수양)의 또 하나 아주 중요하고, 실제적이며 유용한 형태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직업적이든 생활 속 매일 매일의 상례적 일종, 육체로서 혹은 언어로서 행하는 모든 것에 유념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걷거나 서거나 않거나 눕거나 잠자거나, 팔다리를 뻗거나 구부리거나, 주변을 둘러보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생리적인 요구에 응하거나 간에 이 모든 행위에서 그 순간 수행하는 행동에 대해 전심으로 유념하고 집중하여야 한다. 즉 현재의 순간에, 현재의 행동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나 미래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시간, 연관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의 현재의 행동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현재 순간에서의 삶
사람들은 현재의 순간에서 일반적으로 그들의 행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듯이 보여도, 그들의 생각 속이나 그들의 상상의 문제와 걱정 속이나 대화로 과거의 추억 속이나 미래의 욕망이나 공상 속이나 다른 곳에 산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 행하는 것 속에 살고 있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현재에 눈앞의 일에 만족해하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 그들은 해야할 일에 충분히 전념하지 못한다.
간혹 당신은 아주 흔한 광경인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볼 것이다. 그 사람은 식사할 시간조차 없는 무척 바쁜 사람의 인상을 줄 것이다. 그가 식사를 하는지 독서를 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두 가지를 다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즐기지 못한다. 그는 마음이 긴장되고 혼란 되어 그가 현재하고 있는 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현재의 순간을 살고 있지도 못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리석게 현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점심이나 저녁을 하면서 친구와 담소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현재의 삶에서 도피할 수는 없다. 도시든 동굴이든, 어디서 살고 있는 한 삶과 대면해서 살아야만 한다. 진정한 삶이란 현재의 순간이며, 죽어 사라져 버린 과거의 추상이나 아직 생기지도 않은 미래에의 꿈이 아니다. 현재의 순간을 살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살고 있으며, 최고로 행복하다.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찌 그렇게 밝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부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환한 것이다. 미래에 대해 고심하거나 과거를 후회하는 바보들은 잘려진 갈대가 햇볕에 마르는 것처럼 말라갈 것이다."[S.Ⅰ(PTS), p.5.]
집중함 혹은 유의함은 '내가 이것을 한다' 또는 '내가 저것을 한다'고 생각하고 의식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그 반대이다.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을 의식하여 그 행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 하고 있다'라는 관념 속에 살게 된다. 따라서 일 또한 망쳐진다.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연사가 자신을 의식하여 '내가 청중에게 연설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의 연설은 혼란스러워지고 그의 사고의 흐름은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의 연설, 그의 주제 속에서 그 자신을 잊어버렸을 때 그는 최상의 상태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고 사물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적, 시적, 지적 혹은 정신적 작품은 그 창조자가 자신의 행동 속에 몰입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잊고 자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이러한 집중함이나 유의함은 붓다가 가르친 바 현재의 순간에 살고 현재의 행위 속에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가르침에 주된 토대를 둔 선(禪)의 방식이다. 이러한 형식의 명상에서 정신 집중력을 개발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행동을 수행할 필요는 없고, 하는 일이 무엇이든 집중하고 유념해야만 한다. 이러한 특수한 '명상'에 귀중한 시간을 일초라도 허비할 필요는 없지만 평소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의 모든 행위에 대해 주야로 집중함과 유의함을 배양해야만 한다. 위에서 논의된 이 두 가지 형태의 명상법은 우리의 육체와 연관돼 있다.

감정에 관한 명상
그런데 우리의 모든 감각 혹은 정서, 즉 행복한지 불행한지 혹은 중간인지에 관한 정신개발(명상)을 수행하는 방법이 있다. 한 가지 예만을 들어보자. 당신은 불행하고 슬픈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어둡고 침울하여 밝지 못하며 우울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왜 당신이 그렇게 불행한 느낌을 가졌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당신의 불행한 느낌에 대해서 불행해 하지 않고, 당신의 근심에 대해 근심해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왜 불행, 근심 및 슬픔의 감각이나 정서가 있는지 분명히 알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이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원인과 이것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 소멸을 관찰하려고 노력하라. 당신은 마치 과학자가 어떤 대상을 관찰하듯 어떠한 주관적 반응 없이 마치 외부로부터 이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이것을 관찰하려고 시도하라. 또한 여기서 당신은 주관적으로 '나의 느낌' 혹은 '나의 감정'으로 이것을 보아서는 안되며, 다만 객관적으로 '하나의 느낌' 혹은 '하나의 감정'으로 그것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당신은 다시 '나'라는 잘못된 관념을 잊어야만 한다. 당신이 이것의 본성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며 사라지는지를 알 때 비로소 당신의 마음은 그 감정에 대해 냉정해지고, 초연해지며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모든 감정이나 느낌과 관련하여 동일하다.

마음에 관한 명상
이제 우리의 마음과 관련된 '명상'의 형태에 대해 논의해 보자. 당신의 마음이 열정에 들뜨거나 초연해 있을 때, 마음이 증오, 악의, 질투에 압도되었거나 사랑, 연민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언제나 마음이 현혹되었거나 명백하고 올바른 이해를 하였을 때 등등의 경우는 언제든지 그 사실을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게 한다. 누구나 대담하고 진지해야만 하며,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M.Ⅰ(PTS), p.100.]
여기에 옮음과 그름이나 선과 악을 비판 판단하거나 식별하는 태도는 없다. 이것은 단지 관찰하고 주시하며 검토하는 것이다. 당신은 재판관이 아니라 과학자다.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여 그 진정한 본질을 명백하게 볼 때, 당신은 마음의 정서, 감각 및 상태에 대해서 냉정하게 된다. 그래서 당신이 초연해지고 자유로워지고, 그로 인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당신이 매우 화가 나고, 분노, 악의, 증오에 사로잡혔다고 하자. 화가 난 사람이 자신이 화가 난 것을 실제로 알지 못하고 주의하지 않는 점은 흥미롭고 역설적이다. 그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 주의하는 순간, 즉 자신의 분노를 보는 순간, 수줍어하고 부끄럽게 되어 잠잠해 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본성을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나는 화가 났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나의 화'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은 오직 화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주의를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단지 객관적으로 화난 마음을 관찰하고 살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정서, 감정 및 마음의 상태에 관한 태도여야 한다.

윤리적·정신적·지적 주제에 관한 명상
그 다음에 윤리적, 정신적, 지적 주제에 관한 하나의 명상 양식이 있다. 그와 같은 주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연구, 독서, 토론, 대화 및 숙고가 이 명사에 포함된다. 이 책을 읽고 여기에서 논의된 주제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는 것도 명상의 한 양식이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케마까(Khemaka)와 스님들 사이의 대화는 열반의 실현으로 이끌어 주는 명상의 한 양식이다.
그래서 이 양식의 명상에 따라서 다섯 가지의 장애(五蓋, panca-nivarana)에 관해 연구하고 생각하고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⑴ 음탕한 욕망(kamacchanda, 愛欲)
⑵ 악의, 증오 혹은 분노(vyapada, 瞋에)
⑶ 무기력과 권태(thina-middha, 昏沈)
⑷ 초조와 근심(uddhacca-kukkhucca, 掉擧)
⑸ 회의적인 의심(vicikiccha, 疑心)


[譯註: ⑴ 음탕한 욕망(kamacchanda, 愛欲)과 ⑵ 악의·증오·분노(vyapada, 瞋 )는 戒를 방해하고, ⑶ 무기력과 권태(thina-middha, 混沈)는 慧를 방해하며, ⑷ 초조와 근심(uddhacca-kukkhucca, 掉擧)은 定을 방해하고, ⑸ 회의적인 의심(vicikiccha, 疑心)은 四諦를 의심하는 것으로 解脫과 解脫知見을 방해함.]

이 다섯 가지는 어떤 종류의 명백한 이해, 사실상 어떤 종류의 진전에도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다섯 가지에 압도되거나 그것들을 어떻게 벗어나는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옮음과 그름 혹은 선과 악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깨달음의 일곱 요소들(Bojjhanga, 七覺支)에 관해 명상할 수도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⑴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nga):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행동과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유념하는 것이다.
⑵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nga): 교리의 여러 문제에 대한 탐구와 조사. 여기에 우리의 모든 종교적·윤리적·철학적 연구, 독서·조사·토론·대화 및 그러한 교리적 주제와 관련된 강의에 참석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⑶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nga): 끝까지 단호히 노력하는 것이다.
⑷ 희각지(喜覺支, piti-sambojjhanga): 비관적이며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가짐에 완전히 반대되는 특성.
⑸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nga): 몸과 마음의 이완(弛緩). 누구든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긴장해서는 안된다.
⑹ 정각지(定覺支, samadhi-sambojjhanga):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다.
⑺ 사각지(捨覺支, upekkha-sambojjhanga): 불안해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오온 흥망성쇠에서 삶을 대면할 수 있는 평정(平靜).


<譯註: 七覺支는 범어 sapta-bodhyangani, 팔리어 satta-sambojjhang 를 번역한 말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일곱 가지 법이란 뜻이다. 三十七菩提分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을 七等覺支, 七遍覺支, 七菩提分, 七覺分, 七覺意, 七覺志, 七覺支法, 七覺意法, 七覺支寶, 七菩提寶, 七覺寶, 七覺法이라고도 하며, 七覺이라고 略하기도 한다. 칠각지는 다음과 같다. 즉 ①念覺支(sati-sambojjhanga), ②擇法覺支(dhamma-vicaya-sambojjhanga), ③精進覺支(viriya-sambojjhanga), ④喜覺支(piti-sambojjhanga), ⑤輕安覺支(passaddhi-sambojjhanga), ⑥定覺支(samadhi-sambojjhanga), ⑦捨覺支(upekkha-sambojjhanga) 등이다. 長阿含經 第8 衆集經에는 "다시 七法이 있다. 이른바 七覺意이다. 念覺意, 法覺意, 精進覺意, 喜覺意,  覺意, 定覺意, 護覺意이다. 이것은 붓다가 설한 正法을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雜阿含經 第26에도 언급되어 있다. [望月佛敎大辭典 2卷, p.1889上.]>

이러한 특성들을 계발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것은 진정한 염원, 의지 또는 취향이다. 각 특성의 계발에 도움이 되는 다른 많은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은 경전에 서술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나라고 불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조사하는 오온과 같은 주제나 앞에서 논의한 사성제에 관해 명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궁극적 진리의 실현으로 이끄는 이 네 번째 양식의 명상을 구성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한 것들은 별도의 문제로 하고, 전통적으로 총 40가지나 되는 다른 많은 명상의 주제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네 가지 숭고한 상태(Brahma-vihara, 梵住)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⑴자(慈, metta):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하여 무한히 펼쳐지는 보편적 사랑과 호의(好意). ⑵비(悲, karuna): 근심과 고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연민. ⑶희(喜, mudita): 다른 이의 성공, 안녕 및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것. ⑷사(捨, upekkha): 모든 영고성쇠의 삶에서의 평정(平靜).

<譯註: 브라흐마 위하라(Brahma-vihara, 梵住)는 '마음의 숭고한 상태'라는 뜻인데, 無量이라는 의미의 appamana 혹은 appamanna로 불리기도 한다. 즉 정신 계발을 위한 네 가지 실천 항목인 博愛(metta, 慈)·憐愍(karuna, 悲)·隨喜(mudita, 喜)·平靜(upekkha, 捨)를 말한다. D.Ⅰ, p.250f; Ⅲ, p.223f; M.Ⅰ, pp.38, 297; Ⅱ, pp.76, 195, 207; Ⅲ, p.146; S.Ⅳ, p.296; A.Ⅴ, pp.299, 344를 참조하라.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는 그의 저서 {淸淨道論(Visuddhimagga)}에서 이러한 네 가지 상태가 어떻게 계발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청정도론}에 열거된 40 가지의 명상 주제 가운데 네 가지에 불과하다. [ed. G. P. Malalasekera, Encyclopaedia of Buddhism (Ceylon: The Government of Ceylon, 1972), Vol. Ⅲ,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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