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매미'를 보내고 나서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비록 여름 내내 비는 자주 왔고 개인 날보다는 궂은 날이 더 많았지만 큰 태풍이 오지 않아 내심 안도했었는데 또다시 찾아온 대 재앙 앞에선 하늘이 무심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삶의 터전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기도 했다. 농작물을 애써 가꾼 보람도 없이 논과 밭을 통째로 태풍'매미'에게 빼앗겨 버린 농부도 있고 학교 가는 길을 떠내려보내고 고립된 아이들도 있다.
TV의 수해 속보에서 가족과 집을 잃고 실의에 빠져 오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도와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하기사 내 코가 석자라고 작년에 왔던 루사때문에 잃어 버렸던 길을 어렵게 임시 복구해 놓았었는데, 이번에 또 유실되어 길인지 물길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마당 한 가운데로도 물길이 생겨 도랑이 났다. 별일 없느냐며 빗발치는 안부 전화들을 받으며, "괜찮다. 아무 일 없다. 피해 없다" 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보니, 할 말을 감히 잃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태풍의 피해를 천재지변이라 여기고 어쩔 수 없이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지만 중요한 것은 태풍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피해액이 더 늘어간다는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제시하는 분분한 의견 중에서 기온의 상승으로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지는데 원인이 있다는 것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매미'의 위력을 보며 인간의 무지한 탐욕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오는지 모두들 알았을 것이고, 대자연의 흔들림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인지도 실감했을 것이다. 하늘만 탓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인간의 편리함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여 자연생태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한 업보로 받은 재앙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잠깐이라도 걷기 싫어 자동차를 타고, 빠른 것만 추구하여 과속하기 일쑤인 나도 이제부터는 적정 속도를 유지하여 연료 소비를 줄이면 오존층을 파괴하는 유해가스 배출량도 자연히 줄어서 생태계 보호가 될 것이라고 반성해본다.
자주 절에 오는 거사님이 있는데 하루는 아주 즐거운 얼굴이었다. 사연인즉 운전을 하면서 절에 오는데, 나방과 고추잠자리와 벌레들이 차에 부딪쳐 죽는 것을 보고 오계 중 하나인 불살생계에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속도를 줄이니 안전해서 좋고, 연료가 적게 들어 좋고, 옆에 앉은 보살이 잔소리 아니 하니 좋고, 더 좋은 것은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 같아 너무나 좋았단다. 이런 작은 것에서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들의 삶은 자기 둘레를 한걸음씩만 양보하고 뒤돌아본다면 많은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니기엔 좀 불편해도 '매미'가 앗아간 길을 복구하는 일에 서두르지 않을란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우리 현덕사 길을 걸어보니, 지천으로 핀 물봉선, 나름대로 뾰족뾰족 예쁜 여뀌, 노란 마타리와 향기로운 들국화, 그리고 태풍 뒤에 보이는 파란 하늘을 더욱더 돋보이게하는 하얀 억새꽃이 가을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한다. 만월산 현덕사 현 종 2003. 9. 16. 불교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