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과 점심
기사등록일 [2007년 09월 17일 월요일] 마음을 잡는 ‘조심’ 마음 점검하는 ‘점심’ ‘小心’과 유사하나 한 차원 다른 느낌 ‘조심(操心)’은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말은 소심(小心)과 ‘용임(用心)’이 있습니다. ‘소심’은 금방 알 수 있지요? 대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말을 아끼거나 몸을 사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소심하다’의 어근이지요. ‘소심’이 중국어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 용심은 일본어에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용심’이 ‘조심’과 비슷한 말인지 의아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쓴다’는 본뜻을 갖고 있는 ‘용심’은 명사로서 ‘정성스레 마음을 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논어』를 비롯한 『장자』와 『맹자』에는 물론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과 선어록에도 자주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조심’, ‘소심’, ‘용심’은 마음을 쓰는데 있어 깊은 주의를 요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고 있습니다. ‘나쁜 마음’을 쓰기 위한 언어라기보다 ‘좋은 마음’을 쓰는데 필요한 언어인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은 사실 대중가요,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조심’보다는 ‘심성 수양’과 좀 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조심’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유 중 하나는 『맹자』가 널리 읽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맹자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누구나 양심이 있지만 도끼로 나무를 자르듯 하면 금방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혹, 잃어버렸다 해도 잘 양성(나무를 키우듯)하면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양심이나 마음(心)은 잡으면(操) 보존할 수 있고 놓으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양심도 키우고 잡을 수 있어야 유지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불교 용어로 세간에 널리 쓰여진 말 중 ‘조심’과 유사한 말 중 하나가 ‘점심’이 아닌가 합니다. 점심(點心)은 아침, 점심, 저녁을 말할 때 쓰입니다. ‘점을 찍을 만큼 조금 먹는 식사’라는 뜻의 ‘점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맹자의 ‘조심’처럼 좀 더 들어가 보면 수행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산 선사가 『금강경초』를 짊어지고 길을 가던 중 예양에 도착 했는데 이 때가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마침 길에서 떡을 파는 노파가 있어 청합니다. “점심 요기를 하고 싶은데 그 떡을 좀 주십시오.” 그러자 노파가 말합니다. “제가 묻는 말에 답을 하면 떡을 드리겠으나 답을 못하면 다른데서 요기를 하셔야 합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點心)을 찍으려 하십니까?”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는 문구 어디에 마음을 두어 보겠느냐 하는 말인데 선불교에서는 유명한 일화요 화두입니다. 말문이 딱 막힌 덕산 선사는 그 길로 곧장 선지식을 찾아 선문에 들어섭니다. 어디에 마음을 찍을 것인가 하는 ‘점심’은 화두이면서 마음을 점검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잡는’ ‘조심’과 ‘마음을 점검하는 ’점심‘은 꽤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조심과 점심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소심과는 한 차원 다른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저는 소심 하면 소심(小心)보다는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는 소심(素心)을 좋아합니다. 점심 공양시간 만이라도 애써 찍어 보려 합니다. 오늘도 소심(素心)한 마음으로 조심(操心)스럽게 마음 한 점(點心)을 찍어 보고 있습니다. 채한기 부장 penshoot@beopbo.com
917호 [200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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